무명 편지
안녕, 나야.
여름날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랑니 얘기했던 거 기억나? 그땐 내가 충치 치료하러 갔던 치과에서 사랑니를 빼야 한다는 말을 들은 뒤였잖아. 난 처음에 사랑니가 누워서 나고 있으니 얼른 뽑으라는 의사 선생님 말이 거의 사형선고 같았어. 남들은 곧게 잘만 나는데 왜 내 사랑니는, 심지어 아랫니 두 개 다 삐딱하게 누워선 날 괴롭히나 싶어 억울했어. 방학이 시작되면 그냥 바로 뽑아버리라는 네 말에 됐다고, 더 이상 사랑니가 자라지 않을 거라며 괜히 심술부리듯 말했었던 건, 너도 눈치챘겠지만 그냥 무서워서 큰소리친 거야.
결국 난 여름 방학에 사랑니 뽑기는커녕 아이스크림을 왕창 먹었고 겨울 방학을 지나 졸업을 하고서도 사랑니를 뽑지 않았지. 그치만 괜찮았어. 사랑니는 잊을만하면 천천히 아주 조금씩 나와서 가끔 잇몸을 간지럽혔지만 아프지는 않았거든. 내 사랑니는 그래도 착해서 많이 아프지 않구나. 내가 너무 겁을 먹으니 사랑니가 좀 봐준다고 믿었지.
있지, 나 작년 5월에 사랑니 전부 다 뽑았다?
갑자기 왼쪽 사랑니가 시큰거리기 시작한 건 4월 말쯤이야. 치과에선 사랑니가 썩기 시작하면 그땐 옆의 어금니도 같이 썩어 아파서 한 번 울고, 수납하며 치료비에 두 번 운다고 하잖아.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떡하지? 방치하다 뽑을 때 수술해야 하면 어떡하지? 상상 속의 나는 이미 병원에 입원하고 누워있었으니 겁쟁이는 더 늦기 전에 치과로 달려갔어.
치아 사진을 찍고 의사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소파에 앉아서 대기하는데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너도 알지? 치과 특유의 향과 웅웅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더 무서워지는 거. 곧 이름이 불리고 치과 의자에 앉았어. 등받이가 내려가고 얼굴엔 초록색 천이 덮였어. 의사 선생님의 크게 아- 하세요 소리를 듣고 입을 벌릴 때는.. 정말이지 무서워서 심장을 토할 것만 같았고. 그때 옆에 있던 치위생사 선생님이 부들부들한 인형을 안겨 주셔서 아주 꼭 붙잡고 눈도 더 질끈 감았어. 아픕니다- 하는 말과 함께 마취 주사를 맞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의외로 마취 주사는 아프지 않고 빨리 끝났던 것 같아. 얼굴에 덮었던 천도 잠시 걷어두고 의자에 앉아 제대로 마취가 될 때까지 기다렸어. 상어 인형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꼬질꼬질한 걸 보면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 나만 이렇게 겁먹는 거 아니다. 나만 쫄보인 게 아니다! 그렇게 상어 인형 지느러미 부분을 쓰다듬다 보니 왼쪽 입술이 퉁퉁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어. 감각이 무뎌지고 괜히 멍해지는 듯한 느낌에 마취된 곳을 혀로 툭툭 건드려 보고 손가락으로 입술도 꾸욱꾸욱 눌러봤지. 그러다 의사 선생님이 돌아오셨을 땐 의자 등받이가 다시 내려가고, 얼굴 위에 초록 천도 덮고.. 심장은 또다시 두근두근.. 입을 벌리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두근두근.
생니를 조각내어 깨는 과정은 마취를 해서 아프지 않았지만 귀에선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았어. 의사 선생님이 조각난 사랑니를 뽑을 때는 턱도 같이 뽑히는 느낌이랄까. 힘 빼세요- 하는 말에 힘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긴장한 탓에 몸은 빳빳하게 굳었지. 의사 선생님이 사랑니 조각을 이리저리 흔들면 내 고개도 이리저리 따라 흔들렸어. 마취로 직접적인 고통은 없었지만 턱에 전해지는 힘과 우드득 거리는 소리에 괜히 서러워질 때쯤 끝이 났던 것 같아. 아래쪽 사랑니를 먼저 뽑은 뒤에, 위쪽 사랑니도 뽑았을 거야. 아래쪽은 우당탕탕 난리였는데 위쪽은 곧게 자라 있어서 쏙! 하고 10초 만에 나에게서 사라졌어.
사랑니가 뽑힌 자리에 넣어준 솜을 꾹 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침을 삼킬 때면 피도 함께 섞여 비리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어. 그래도 하나를 뽑았다는 뿌듯함과 여전히 한쪽 더 남았다는 짜증이 반복하며 오갔지.
한동안은 턱을 잘 움직이지 못했고 잊을만하면 욱신거리는 탓에 신경 쓰여서 좀 예민하게 보냈어. 실밥을 제거하고 통증도 점점 가라앉을 무렵에는 사랑니가 빠진 자리를 계속해서 혀로 만져본 것 같아. 작은 구멍이 생긴 곳을 혀로 스치면 기분이 오묘했거든. 입 안에 구멍이 생겨버렸으니까.
남은 사랑니를 빼는 건 쉬웠어. 이것도 한 번이 어려운 건지 오른쪽은 왼쪽보다 수월하게 뽑혔고, 사랑니를 뺀 뒤의 통증도 훨씬 적었어. 구멍 난 곳을 혀로 만져보는 기분은 여전히 이상하면서도 신기했지.
나는 여름날에 했던 얘기를 기억해.
사랑니를 뽑으면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일 거라고 했던 거. 사랑할 때 나는 게 사랑니인데 열아홉의 우린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서, 사랑할 때 나는 이라는 이름은 다 거짓이라고. 고등학교 3학년에 자라기 시작했으니 수능니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우리끼리 수능니로 이름을 바꿔 불렀잖아. 내 사랑니가 누워있으니 넌 괜히 수능니가 옆으로 누워 날수록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거랬어. ‘넌 수능니를 보니 최소 스카이다.’ 그땐 그 말이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지금은 괜히 눈물 날 것 같아. 나는 뭐라 답했더라. 너는 아직 사랑니가 나지 않았을 때니까, 잠재력이 매복되어 있으니 해외로 나갈지도 모른다며 외국 대학 가면 나 기념품 사달라는 얘기를 했을 거야. 그러곤 수능니 이야기는 갑자기 외국 대학으로 넘어가더니 결국 가십걸로 빠져 어퍼이스트사이드니 브루클린이니 했지. 나는 그날의 이야기가 참 좋았나 봐.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도 기억할 만큼.
나는 작년에 사랑니를 뽑았지만 진짜 어른은 되지 못했어. 여전히 겁도 많고 아픈 것도 싫어해. 회사에서 입을 옷을 몇 개 정해두고 교복 아닌 교복을 입고 다니지만, 왼쪽 가슴에 명찰은 없는 어정쩡한 가짜 어른이지.
사랑니를 뽑는 건 사랑이 통째로 뽑혀나가는 기분일 것 같다고 했던 말도 기억해? 사랑니를 품은 채의 우리가 품은 생각이었잖아. 사랑니를 뽑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어. 어쩌면 내게만 찾아온 아주 큰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사랑니가 뽑힌 자리엔 더 큰 사랑이 심기는 거야. 내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랑이 내 품을 차지하려고 지난 4월에 사랑니가 시큰거렸나 봐. 더 큰 사랑이, 거긴 내 자리니 비키라고 밀어내기 시작했던 거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아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우리 둘 다 사랑니 빼기 무섭다는 거였어.
너는 어때?
사랑니는 뽑았니?
아직 무서워서 뽑지 않았다면, 용기 내보는 것도 좋을 거야. 사랑니가 뽑힌 자리에 더 큰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사랑니 뽑으면 나한테 꼭 말해주기야. 그땐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또 사랑니 이야기 하자, 우리.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집까지 걸어가던 여름날이 그립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