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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Jan 10. 2024

사선에서

무명 편지


안녕, 나야.

이렇게 인사하는 게 어색하고 낯설다. 너도 비슷할 것 같아. 아니면 뻔뻔하게 인사가 나오냐고 화를 내려나?


먼저 선 그어서 미안해.

근데 나는 그렇게 선을 긋고 나서 너무 편해졌어. 학창 시절부터 꽤 오랜 시간 함께했던 너에게 냉정히 선을 그었지. 여지도 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러 아주 진한 선을 말야. 그렇게 선을 그어 놓고 시절인연에 괴롭다는 말을 하다니 나도 참 모순이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나는 그 선 덕분에 숨을 쉬었어.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고 나눈 추억이 많았잖아. 그래서 너무 힘들고 괴로웠어. 시간이 갈수록 나는 너랑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거든. 아예 정반대로 달랐다면 조금은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다 핑계야. 나는 그냥 너랑 멀어지고 싶었어.


네 곁에 있으면 나는 너무 초라한 사람이 되더라. 내가 자처에서 초라해졌다면 그건 다 자격지심이고 나의 문제니 선을 그을 이유는 되지 않았을 거야.


너는,

너는,


나를 너무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어. 같이 놀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 동안 쌓인 옹졸하고 치졸한 마음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내가 섭섭한 게 맞는데 섭섭해하면 쿨하지 못한 사람, 삐진 사람,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 이게 어찌나 서럽던지.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좀 예민한 거겠지 하면서 꾹꾹 눌러 담았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었으니까.


너는 나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잖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넷이 만나면 꼭 SNS에 10년 지기라며 가장 오랜 친구라고 말했지. 그럴 때마다 누가 손톱으로 어깨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어. 나는 너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한 적이 없었으니까. 가끔은 짜증도 났어. 정말로 나를 가장 친한 친구라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기도 했어. 우리가 정말 친한 게 맞아? 그런데 왜 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물음에 네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너에게 기쁜 소식이 생길 때면 진심으로 축하하고 함께 기쁘고 싶었어. 하루는 네 소식에 아 진짜? 잘됐다. 하곤 무덤덤한 나에게 반응이 왜 그러냐고 진심으로 속상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어. 그날, 나는 결심했어. 선을 그어야겠다고.


다른 친구들의 기쁜 소식에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축하해 줬는데 왜 너의 소식엔 무덤덤했을까? 내가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라 친구의 소식을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던 걸까?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어.


그냥.. 그냥 내가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처음부터 삐뚤어진 관계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처음 만났을 때 너로 인해 웃고, 즐겁고, 행복했던 사실도 분명하니까. 넌 특히 주위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주목받는 사람이었어. 소심하고 내향적인 내가 보는 너는 빛이 나는 사람이었지. 그래서 처음 친해졌을 땐 기뻤어.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다른 반 친구들처럼.


그런데 점점 힘들었어. 선을 그은 뒤에야 말할 수 있는 용기 없는 나지만, 넌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거든.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친구가 아니었어. 네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했던 이유는 너 때문이야. 내 기쁨에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너를 발견했던 날, 충격적이었지. 모든 나의 기쁨을 축하해주지 않았던 게 아니잖아. 너는, 그냥 너보다 내가 기쁜 상태인 것을 인정하지 못했었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해. 왜 나보다 니가 더 행복하냐며 묻는 얼굴을.


그땐 너무 충격적이라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어. 사람은 살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반복되잖아. 네가 힘들 때 나만 좋은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해. 사람이 어떻게 힘든데 타인의 행복을 온전히 축하해 주니. 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네가 좋은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조금 더 좋은 일이 있으면, 너는 웃지 않았지. 은근슬쩍 나의 소식을 네 소식보다 덜 좋은 일로 만드는 말을 눈치챘을 때. 이건 친구가 아니라고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던 날. 그때부터야.


이렇게 말하면 너는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화를 낼까.

근데 있잖아. 나는 이게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아. 결코 착각이라 생각지도 않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의 감정들. 찰나의 표정과 차가운 온도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해.


그래서 나는 선을 긋기로 다짐했어.

너를 포함해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들에게 먼저 사과했어. 나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깨지는 것에 죄책감이 들지만, 나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어. 네 말에 구태여 신경 쓰고, 너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내가 치졸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서른이 되기 전에 너한테서 멀어질 거라 선언했지.


여기까지 들으면 너는 나에게 모난 마음이 들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어. 그런데 말야, 나는 그냥.. 너랑 멀어지고 싶었어. 우리가 대화를 한다고 달라질까? 이게 오해가 맞을까? 오해라면 내가 더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너는 전혀 아닌데 나 혼자 네 마음을 곡해한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이미 천천히 선을 그어가며 나는 너로부터 참 많이도 멀어진 뒤였거든. 지금도 여전해. 너랑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들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너에게 선을 긋고, 삐뚤빼뚤한 사선 뒤에서 바라봤을 때 비로소 우리의 추억을 웃으며 마주할 수 있었거든.


내가 천천히 너에게서 멀어지는 시간 동안, 네가 나에게 보낸 신호를 알고 있었어. 못 들은 척해서 미안해. 그냥.. 그냥 나는 너랑 다시 싸우고, 화해하고.. 그렇게 관계를 이어 나가는 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어. 너를 밀어내는 동안 나의 소식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슬퍼해주는 새로운 인연들이 너무 많이 생겨났거든. 고마운 그 사람들에게 내 남은 에너지를 쏟기 위해 네가 보내는 신호를 모두 외면했어.


가끔 다른 친구들이 네 소식을 전해줄 때가 있어.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딱 여기까지의 마음이야.

퇴사한 동료의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처럼, 좋은 소식에는 적당히 축하하며 슬픈 소식에는 아이고 어쩐다니, 적당히 슬퍼해. 그리곤 다음에 먹을 메뉴를 생각하지.


그 정도인 거야.

말도 없이 선 그어서 미안해. 이건 진심이야.


모쪼록 잘 지내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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