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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 Sep 07. 2024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는 k가 생각난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지하철로 급히 들어갔던 그 날이 내 기억속에 깊이 박혔다.

작년 여름 이맘쯤이었다. k와 나는 약간 날선 감정을 주고받았다. 나는 늘 의심이 많은 쪽이고 상대는 언제나 우리가 평화롭기를 바랐다.


"동네로 올 수 있어? 집에 갈 때 태워다줄게."

약속 장소로 이동하려는 찰나, k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날씨가 더우니 식당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폭염주의보가 발령 된 낮시간이었다. 원초적인 이름을 가진 식당에 가기로 했다. 막국수와 묵사발을 파는 오래된 식당이었고, 이 동네 친구들 대부분이 여름마다 한번씩은 꼭 이곳의 음식을 먹었다.


k는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함께 밥을 먹어도 되냐 물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사람이 보였다. 덩치가 산만한 두 남성이 병렬 구조로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현관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그들을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k는 이번에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 친구를 사귄 듯 했다. 나는 그 사정을 안보고도 본 듯 하여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나이가 어려보이는데... 학생이세요?"

옆에 앉은 사람은 스물다섯이라고 답했다. 나는 만으로 스물다섯이 아니고 한국 나이 스물다섯이냐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축구모임에 나갔다가 k를 만났다고 덧붙였다.

"처음에는 제가 엄청 다가갔는데, 형이 부담스러워 하더라고요. 근데 어느순간 포기했더니 마음을 열어줬어요."

그의 마음이 아주 공감되어 크게 웃었다.


나는 오랫동안 k와 우정을 나눴다. 가닿는 마음만큼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때면 슬퍼졌다. 그러나 k가 자신만의 방식대로 마음을 표현하면 어느때보다 고맙고 충만했다. k 역시 자신의 신비스러운 이미지와 여린 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면서, 부드러운 응답을 받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대화하고 싶어졌다.

"내가 형의 트랩에 들어온 거였다니."

그는 내가 k를 잘 아는 것 같다며 앓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눈치를 살핀 뒤 말했다.

"k에게 어린 친구들이 많은 건, 마음이 아직 스무살이라 그래."

k는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리고 싱긋 웃었다.

옆에 앉았던 친구를 보내고 우리는 근처 카페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로 연결되는 작은 골목에 짧은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멈춰섰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고, 신호등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인 열걸음짜리 횡단보도였다. 날은 여전히 더웠고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는 동안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무심하게 길을 건너지 않고 공백을 채우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공유해 온 어떤 신념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일 년의 공백이 함께 떠올랐다.

"지난번에 헤어지면서 그랬잖아. 먼저 만나자고 하겠다고. 이번에 네가 먼저 보자고 했어. 약속 지켰네."

k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공이 너무 커서 눈이 까맸다.

"나는 그 날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때가 언제였지?"

"작년 여름. 내가 어린왕자 책 선물하면서 울었잖아."

이야기를 꺼내놓고 민망해져서, 나는 영수증을 찍었다.

"맞아."

그가 답했다.


늘 생각했다. 그가 어린왕자라면 나는 빨간 머리 앤이었다. 두 인물이 실존했다면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앤은 어린왕자의 순수한 마음과 선한 의도를 모두 눈치챌 수 있을까, 어린왕자는 앤의 에너지와 호기심을 소화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서른 언저리에 왔다. 그간 벌어진 일과 배운 마음에 대해 나누면서 나는 슬펐다.

"이상하지? 우리가 보낸 시간에 슬픈 일은 없었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 생각할 겨를도 없이."

k의 시선은 나를 향해 정확히 꽂혀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예전보다 표정이 많아졌고, 그럼에도 표정이 세분되어 있었다. 한컷한컷 섬세하고 진중한 의미가 들어찬 얼굴. 그 얼굴에 얼핏 따스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워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의 말에 나는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므로 빠르게 수긍했다. 그래놓고도 후회했다. 성급했기 때문이다.

k는 잠자코 있다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운전하는 차를 얻어타고 다음 일정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k는 전보다 운전이 소란해졌고, 음악은 클래식에서 재즈로 바뀌었다.


나는 k의 말에 둥글에 스며든 다정을 떠올려봤다. 신호에 걸리지 않고 낯선 구간을 쭉쭉 통과해왔다. 트렁크에 우산이 있을거라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빗길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흐린 와중에 개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능하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대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의 스무살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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