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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 Sep 08. 2024

B를 돕기 위해 그의 동네로 갔다.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후 햇살이 창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뺨 위로 흐르는 것을 자꾸만 닦아냈다. 어디선가 아는 사람이 나타나 왜 울고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되도록 혼자 있을 때 울고 다음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감정을 추스른다. 그냥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최근에 B를 만났던 건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다. 가랑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만남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나는 그의 동네에 익숙하게 오갔고, 이제 B는 웬만한 맛집에 다 가본 듯 지루해했다.

"어디쯤이야, 지하철 탔어?"

"지금 막 탔어. 밥 먹기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은데, 먼저 먹고 있을래? 나 가면서 간단히 먹고 가도 돼."

"어유, 아니야. 같이 먹어야지. 얼른 와"

"알겠어. 도착시간 문자로 보낼게."


새침한 목소리가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세밀하게 감정을 느끼는 B가 나의 이면을 눈치채지 않았을지 걱정이 됐다.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내다가 생각했다.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어떡하지?'

아침에 공들여 그린 아이라이너는 아직 멀쩡했지만 양 볼과 코끝이 연지곤지를 한 것 처럼 붉어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쿠션을 꺼냈다.

'복잡한 가정사 때문이라고 할까?'

'제 감정도 잘 모르는 게 답답해서라고 할까?'


B가 사는 건물의 지하1층 김밥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코너를 도는 자리에 매물이 나와있었다. 원래 호프집이 있던 자리였는지 시트지가 지저분하게 붙었고, <착한 임대료. 협의가능.>이라는 투박한 프린트물이 여러장 보였다.

"어, 왔네."

B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품이 넓은 셔츠를 입었다. 일할 때는 딱 붙는 옷을 입는데 다른 스타일의 착장을 보니 왠지 실제보다 더 못본 듯 했다. B를 발견한 나는 통화중이던 것을 마무리했다.

복잡한 고향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먼 곳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더 좋은 법이 없었다. 무조건 멀리 가려다보니 서울살이를 하게 되었고, 가능한 저렴하게 지내려다보니 지원이 많이 되는 교회 기숙사에서 첫 자취를 시작했다.


B와 함께 방을 쓴 시절은 가족 아닌 타인과 살아보는 첫경험이었다. 나에게는 완전한 자유였고 B에서는 유난한 고생이었던 시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전공과 성격을 비롯해 겹치는 것은 별 없었다.

약간은 상기 된 표정과 목소리로 B가 말했다.

"뭐 할래? 이따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김밥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B의 남편이 들어왔다. B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들어오다가 외삼촌이랑 할머니 마주쳤어, 이따 여기 견적보러 온다고 이야기해썽."

그의 남편은 나에게 정중한 목례를 하고 물을 떠다주었다. 그리고 같은 상가에서 점심 먹을 곳을 찾는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잠시 매장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드디어 숨을 고른 B에게 물었다.

"계약한 가게가 이 건물이야?"

"어, 아까 너 보고있던 곳. 저기 코너에. 음식 나오기 전에 한번 보고 올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나섰다. B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홀딩도어를 가리키며 말햇다. 나는 그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이건 통유리로 바꿔준대."

"잘 됐네. 오늘 그럼 견적 다 뽑고 업체 정하는 거야? 공사 바로 들어가려고?"

"공사는 추석 이후에. 타이밍 잘 맞으면 2주 정도 걸릴 것 같아."

김밥을 씹으면서 B의 얼굴에 은은하게 깃든 흥분을 관찰했다. 결정한 이후에는 돌아보지 않고 추진하는 것이 그의 패턴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고, 대학원에 가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컨텐츠를 만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보통 이상의 꾸준한 성취를 했는데, 말로는 늘 자신이 없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내가 B를 대신해 주변의 상권을 분석하는 동안, B는 간판업체 사장님을 만나고 로고를 토대로 한 명함을 만들었다. 공간 안에 구성할 가구의 위치를 가늠해 만든 도안을 내게 보여주었다.

"가벽을 만들려고?"

"응. 평소에는 넓게 쓰고 예약 있을 땐 분리해서 쓰고. 커튼으로 해놓으려고."

나는 적당한 톤으로 호응한 뒤 다시 한 번 공간을 살폈다. 얼마 후에는 이곳에서 일할 B의 모습도 한 번 그려보았다. 내 몫이 어느정도 끝난 뒤에는 B에게 전달한 내용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을때 B는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생각에 이 역할을 너보다 잘 해줄 사람은 없어. 남편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나는 승리를 거머쥔 사람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주변에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나의 그늘을 유예했다. 어쩌면 나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게 아닐까. 잊고 있던 눈물을 기어이 다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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