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매들린 매캔 실종사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세상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한 사건에 대한 세상의 반응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확장되었다가 어떻게 종결되는지, 그 모든 것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보여주는 다큐. 길기도 길다. 긴 만큼 자세하고 자세한 만큼 잘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해자의 대응방식에 대한 논란이 흥미롭다.
2007년 포르투갈의 한 휴양지에서 3살 여자아이가 사라진다. 부모는 지인들과 함께 휴가를 온 영국인 의사 부부. 아이가 사라진 시간이 밤 10시경인데 그때 부모는 지인들과 함께 숙소로부터 90미터 떨어진 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다. 늦은 밤에 아이 곁에 없었던 부모, 똑똑한 의사 부부, 어여쁜 여자아이, 잘 사는 나라의 휴양객, 우왕좌왕하는 현지 경찰, 엉망이 된 사건 현장. 이 몇 개의 코드 안에 이 사건의 비극적 성격이 모두 들어있다.
몇 번 용의자가 특정되기는 한다. 맨 처음 타깃이 된 사람은 사건 주변을 맴돌던 영국인. 그와 사업적으로 얽혀있던 러시아 인까지 묶이지만 엉뚱한 용의자 사냥이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 집단도 용의자로 등장한다. 소문만 무성할 뿐 성과는 없다. 그런저런 용의자 사냥의 반복. 영국 언론은 포르투갈 경찰의 무능을 비판하고 여론은 요동친다.
그러다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다. 느닷없이 아이의 부모가 용의자로 등장한 것. 포르투갈 경찰은 부부가 쓰는 차량에서 추출한 혈흔이 사라진 아이의 것과 일치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차에서 발견된 혈흔은 체액이거나 쌍둥이 동생의 것일 수도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러자 '시체 냄새'를 감지한다는 수색견을 동원해 부부의 차 트렁크에서 수색견이 시체냄새에 반응했다고 주장한다. 누가 봐도 신빙성이 낮다.
그런데 이런 엉성한 주장이 먹힌다. 여론은 급격히 방향을 틀어 이제 부부를 타깃으로 삼는다. 주요 타깃은 아이의 엄마. 아이를 잃은 엄마가 울지 않았다 등등 뻔하고 익숙한 마녀 사냥이 시작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볼멘소리도 힘을 받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의 평범한 부부의 아이였다면 이만큼의 관심을 못 받았을 것이라는 지적들. 배는 점점 산으로 간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이 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부부의 대응방식은 처음부터 확실히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사건이 터지자 부부는 바로 '대변인'을 고용한다. 흔히 하듯 지인이 대신 나서서 부부를 대변하는 정도가 아니다. 홍보 기획과 언론 대응을 전문하는 하는 '진짜 전문가'를 고용한 것. 그리고 언론관련자 친인척을 총 동원해 언론의 관심을 주도적으로 조직한다. 영화에서 한 인터뷰이는 '사건에 언론을 끌어들인 건 부부였다'고 말한다. 부부는 후원자가 제공해 주는 전용기를 타고 주변국가들을 돌면서 기자회견을 한다. 사설탐정도 고용한다.
부부는 자신들이 언론을 잘 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언론의 관심이 높을수록 제보도 활발하고 수사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피해자가 언론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뭔가 익숙하지 않거나 자연스럽지 않은 흐름에는 꼭 반동이 따른다. 부부의 대변인으로 고용됐던 인터뷰이의 한마디가 이 이치를 가장 명확하게 짚는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자신을 드러내면 어느 시점에서는 언론이 반발할 거란 점을 예상해야 한다. 그건 쓰나미와 비슷하다. 파도가 밀려나가면 언젠가는 다시 밀려오는데 그 강도는 전과 같거나 더욱 사나워져 있기 마련이다."
비단 이 사건의 문제만이겠는가. 평범한 개인도 조회수와 관심을 먹고사는 세상, 모두가 한 번쯤은 새겨 생각해 볼 만한 주제다. 언론은 어찌 보면 그저 무리져 흘러 다니는 수초 같은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있는 곳을 향해 흘러갈 뿐이다. 문제는 언론이 아니라 그 언론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의 관심들일 터. '관심'의 시선은 오늘도 수초처럼 흘러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거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지혜일 텐데 그게 어디 쉽겠는가. 매들린 매캔 실종사건은 아직도 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