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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Apr 03. 2024

낭만이 소중한 이유.

발전과 낭만은 비례하지 않는가

방청소를 하다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받은 인터넷 편지 뭉치를 발견했어.

방청소하다가 추억의 물건 발견하면 그날 청소는 끝나는 거 알지?

청소는 미루고 묵혀둔 인터넷 편지들을 살펴봤지.



17년 12월 크리스마스 다음날. 영하 25도였던 양구에서 시작된 훈련소. 인생 처음 핸드폰도, TV도, 라디오도 없는 단절된 생활. 입대 전 삶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매주 월, 수, 금 저녁 점호시간에 받던 인터넷 편지들뿐.

어느 날 사라져 버린 날 기억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놨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우리 집에 있는 줄은 몰랐어.


편지를 써준 친구들 이름을 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보는 사람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고, 그때보다 지금 더 친해진 사람들도 있고. 편지들을 받을 때는 ‘이 사람들과는 평생 같이 가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


내가 궁금해할 사회 정보를 알려주는 편지, 자신의 일상을 공유해 주는 편지, 나를 놀리는 편지, 있지도 않던 전 여자친구의 편지까지…. 다양한 편지들이 있더라.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는 같은 날 논산 훈련소로 입대한 친구에게 온 인터넷 편지였어.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가 내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동생에게 붙여달라 했었는데, 그 친구도 자기 동생한테 나한테 편지를 써달라고 했나 봐. 편지를 작성할 수 없는 사람이름으로 편지가 오니까 놀라웠지. 그리고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쁘기고 하고.

또 한 번은 내가 학생회 사람들에게 손 편지를 썼었나 봐. 그중에 한 친구는 패스~라고 해서 굉장히 실망했다고 하더라. 근데 내가 그 친구한테 나중에 편지를 써줬는지 안 썼는지 생각이 안 나더라…

혜연아 미안하다! 내 글을 읽는다면 사과를 받아주렴!


편지들을 쫙~ 다 읽고 나니까 괜히 감수성 터지는 느낌… 요즘 군대 훈련소 간 친구들은 이런 느낌을 알 수 없겠지. 훈련소에서 핸드폰을 쓰게 해주는 시간이 생겼더라고. 핸드폰을 쓰게 해 주는 게 더 편하지! 훈련병들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을 주는 것도 무조건 맞는 말이고. 그래서 자연스레 인터넷 편지는 영영 쓸 수 없어졌다고 하더라…. 나에게 있어서 인터넷 편지는 군대에서 찾을 수 있는 큰 낭만이었는데. 아쉬웠어.


이젠 구시대의 유물이 된 편지들을 바라보는데, 아빠가 보낸 편지가 보였어. 아빠의 편지에는 주로 아빠의 군생활이 적혀있는데, 나름의 공감대 토크였겠지?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픈 아빠 군대만의 낭만이 조금 적혀있더라. 90년대 초 군대의 낭만은 뭐였을까. 60km 행군을 힘들게 달리는 것…? 아니면 가족들과 연락 한통 없이 지내다가 신병 휴가 때 힘찬 ‘충성!‘과 함께 인사를 하는 것일까.

내가 군대 갈 때 아빠는 ‘그래도 훈련소 동안 아예 연락 없이 지내는 게 낭만인데, 요즘은 편해졌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낭만이란 건 조금의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행동할 때 생기는 걸까?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훈련소에서 핸드폰 쓰면 무슨 낭만이 있냐!

손 편지받는 첫날 엄마가 쓴 손 편지 읽고 침낭 뒤집어쓰고 좀 울고, 여자친구가 써준 손 편지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자친구한테 연락 끊긴 동기를 토닥여주고, 인터넷 편지 많이 받을 때 느껴지는 동기들의 부러운 시선들을 조금은 만끽하고. 같은 날 입대한 친구한테 받는 인터넷편지의 짜릿함을 느끼는 게 빡빡이 D+N일차들의 낭만이 아닐까 싶어.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핸드폰을 매일 쓸 수 있는 훈련소가 오겠지? 그럼 지금 군대를 가는 친구들은 ‘아, 일주일에 한 번 핸드폰 쓰는 거 기다리는 게 낭만인데. 요즘은 빠졌네 빠졌어~’라고 하는 날이 올 거야. 각자의 낭만은 기술, 제도의 발전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는 거지.



편지를 보고 감수성에 빠졌던 나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방청소를 다했다고!

그리고 컴퓨터를 켜보니 N전자메일로 상반기 작계훈련 통지서가 왔네? 이런 건 좋다 ^^



[예비군 교육훈련 소집통지서]

4월 어쩌구 저쩌구 안 오면 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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