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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Apr 09. 2024

방송분량 save? safe.

도전골든벨 1번 탈락의 추억.

어제 야구 주제로 한화를 응원하는 글을 썼었는데, 오늘은 제 학창시절 레전드 야알못 일화를 써보려고 합니다.


본투비 축구 팬이었던지라 누가 '야구 어느 팀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당당하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할 정도로 야구에 관심이 없었어. 야구를 모른다고 해서 인생을 살며 손해볼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학교가 KBS1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고3 수험생에게 얼마나 재밌는 경험이겠어. 수능 공부를 다 제치고 합법적으로 놀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행복했다는 것…! 골든벨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멍청한 편도 아니고! 평소 잡지식이 많다고 자신 있던 차라 '이거 잘하면 최종 4인 안에 들어서 TV에 얼굴 좀 나오겠는데…?'라는 기대를 했어.

촬영 전날 좀 설레서 잠을 못 설쳤지. 촬영 당일에 학교를 들어서면서 학교에 핀 꽃 종류, 학교 엘리베이터 옆에 걸려 있는 그림의 제목 등을 보면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를 열심히 추리하는 준비도 했다고.


그리고 시작된 골든벨. 1번부터 100번까지 한 줄에 10명씩 10줄에 학생들이 앉았어. 나는 74번이었으니까, 절반 넘는 학생들이 내 앞에 앉아 있었거든? 속으로 '내가 이 사람들 다 떨어트리고 혼자 남으면 진짜 짜릿하겠다..'라고 생각하며 내 자리에 앉았어.


골든벨에서 참가 학생을 선택할 때, 인터뷰를 하는데, 그때 몇몇 학생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문제마다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그런 학생들이 떨어지면 안되니까 보통 초반 문제에 인터뷰 문제를 많이 배치하는데, 우리 학교의 경우는 1번부터 인터뷰 문제인 거야.



근데 그 인터뷰 내용이 야구였나봐. 야구 문제가 나온거야. '구원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1이닝을 막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라는 뉘앙스의 질문이었어.


오우, 1번 문제부터 떨어지겠는데?ㅋㅋㅋㅋ. 굉장힌 위기감을 느꼈어. 진짜 모르겠더라.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이거 진짜 망했는데? 싶었어.


그래서 그러면 안됐지만 옆에 앉은 친구의 칠판을 슬쩍 곁눈질로 봤어. 영어로 SA까지 적었더라.

아 정답이 그거야? 두 글자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 정답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정답을 적었지.


"자 정답을 들어주세요!"

100명의 학생들이 칠판을 들고 우와오아아아 소리를 쳤어. 그때까지도 '아, 진짜 이것만 편법 쓰고 다음 문제부터는 진짜 내 실력대로 풀어야지.'생각했거든.


10초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남자 MC분이"자, 정답이 SAVE인 학생들. 칠판을 내려주세요."하는 거야.

'와 정답. SAFE인데. 이걸 틀리는 애들이 있넼ㅋ'


'누가 틀렸나 구경 좀 할까'하는 마음으로 칠판을 들고 있는데, 저기 내 앞앞 칸에 있던 애가 칠판을 내리는 거야. '아 쟤만 틀렸구나.' 하는데, 그 옆에 애도 칠판을 내리고, 내 친구도 칠판을 내리고, 내가 곁눈질로 훔쳐본 친구도 칠판을 내리더라고. '어라? 얘는 왜 틀렸지?' 이상하다…. 싶었지.


근데, 맨 앞줄 애들이 줄줄이 칠판을 다 내리데. 그리고 그 뒤의 줄 다 내리고. 도미노처럼 내려가는 칠판들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때는 너무 늦은 후였어. 나 빼고 99명이 칠판을 내렸더라?


본능적으로 느꼈지. '오, 나만 틀렸구나.' 'x됐다'.

19살 접니다.

알고보니 정답은 'save'였고, sa만 보고 난 safe를 생각했던거야. 나만 틀린거지. 99명의 학생들, 몇십 명의 방송팀, 교장선생님과 1,2, 3학년 학생주임 선생님들부터 구경 온 전교생 친구들까지 도합 1000개의 달하는 눈들이 나만을 쳐다본 경험은 인생 처음이었어.


어젯밤 최후의 1인이 되어서 마지막 문제 칠판을 들었을 때 상상했던 그림이긴 한데…. 아 1번은 아니잖아….진짜 너무 부끄럽고, 어디 얼굴을 가릴 틈만 있다면 거기 얼굴을 처박고 싶었어. 진짜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열심히 살아온 19년의 인생이 '골든벨 1번 문제 탈락'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재밌게 넘어가고 싶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어.

'인터뷰 하겠지? 이제 어떡하지?? 남자 MC분이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어. 솔직하게 몰랐다고 해? 그럼, 편집 각인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거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1번에서 혼자 탈락한 거 통편집 되고, 학교에선 1번에서 혼자 탈락한 병X되는거야. 기왕 병 X인 거 재밌게 TV 탄 유쾌한 병X이 되자. 뻔뻔하게 가. 아 몰라.'


그리곤 MC분과 인터뷰를 했지.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너가 맞은 것 같니, 친구들이 맞은 것 같니?'라는 질문이었는데, 거기에서 '못 맞힌 친구들이 불쌍해요'라는 멘트를 했던 것 같아. 나…. 나름 뻔뻔한 대답이라 생각해서 좀 만족하면 탈락했다….

내가 PD였으면 더 자극적인 자막을 썼을 텐데.

내가 탈락한 이후에 오승환 선수의 팬인 후배가 인터뷰하더라. 속으로 '쟤만 아니었어도 1번 탈락 안 했을 텐데…!'라고 원망 조금 했었는데, 방송에선 내 인터뷰만 나오고 후배 인터뷰는 편집 되었더라. 그래서 좀 미안했다!



혼자 탈락 속에  앉아 있는데, 문제가 몇 개가 지나갈 동안 계속 혼자 앉아 있었어. 내 바로 뒤에는 처음 보는 후배들이 앉아 있었는데, 굉장히 부끄러웠다….

하지만 패자부활전으로 귀신같이 부활!!!

최종 11인까지 들었거든요…. 그때 떨어질 때도 인터뷰를 했었지. 근데 그때는 '이 정도면 뭐…. 1번 탈락보단 괜찮다.' 싶어서 편하게 인터뷰했더니, 그건 편집되었더라고. 그래서 TV 속에서의 나는 1번 탈락한 학생으로만 나왔습니다…. 하하하 ㅜ. 즐거웠다 내 19살.



+ 촬영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반에 잠깐 올라갔더니 이미 1번 탈락 소문이 퍼졌더라구요.

근데 제가 일부로 틀렸다고 다들 생각했는지 'PD가 되겠다더니 넌 정말 방송을 아는 미친놈이구나!!'라며 다들 따봉을 날려줬어. 처음에는 '그 편이 조금 더 나을 지도'싶어서 일부로 틀린 척하고 다녔었습니다 ㅎㅎ


제 탈락영상이 궁금하시다면 도전 골든벨 773화를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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