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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Sep 24. 2024

바닷가에서 퍼올린 정.

수정3.

우리는 UN의 <파도>가 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안목 해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네, UN의 <파도> 듣고 오셨습니다. 최근 바닷가에서 안 좋은 사건이 있었죠. 요즘 이런 묻지 마 범죄가 늘어나고 있어 걱정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끊이질 않으니까 사람이 무서워지는 것 있죠. 엘리베이터에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이 타면 괜히 무섭다니까요.’

‘옛날에는 아파트 현관문도 다 열어 놓고 지내고, 엄마가 집에 없으면 옆집에 들어가서 놀기도 했었는데, 요즘엔 한국인의 정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위기라는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딸깍


“다 왔다. 내리자~!”


차에서 내리니 바다 짠 내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국적인 에메랄드빛 해변가는 마치 이곳이 해외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얼마나 예뻤으면 이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안목’이 좋다 하여 해변 이름이 안목 해변이다. 


비수기의 바닷가는 여유롭고, 한적했다. 찰박찰박, 파도 소리가 귀에 스며드니 어릴 적 해수욕장에서 놀았던 생각이 났다. 

바닷가에 갈 때마다 난 땅을 깊게 파곤 했다.

혼자서 땅을 파는 건 굉장히 길고 외로운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여러 명의 형님이다.


가장 착하게 생긴 형이 다가와서 “형이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만 끄덕이면, 형은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하곤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형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굉장한 속도로 땅을 팠다.


땅을 판 형들은 “엄마 말 잘 듣는다고 안 하면 안 꺼내줄 거야. 숙제 밀리지 말고, 양말 거꾸로 벗어 놓지 말고…”라고 애정이 어린 잔소리하며 나를 묻어줬다.

멀리서 엄마가 날 축구공이라 착각할 만큼 목만 빼꼼히 내놓은 채로.

날 묻고 난 후 형들은 ‘오늘도 한 건 했다’라는 표정으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돌아갔다.


형들이 잔소리할 때마다 나는 ‘말 잘 들을게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를 꺼내주고 가는 형은 한 명도 없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바닷가. 동생과 옛 기억을 되살릴 겸 땅을 파고 있었는데, 우리 옆에 꼬마 형제들이 눈에 띄었다.

성벽 쌓기 놀이하는 형제. 

나는 동생에게 “우리 쟤네 땅 파줄까?”라고 물어봤다.


동생은 “형, 시대가 변했어. 요즘 MZ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그리고, 뉴스 좀 봐. 여기 최근에 묻지 마 사건 때문에 다들 예민해” 라고 말했다.

‘그렇지…맞아. 요즘은 그런 게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아쉬움에 형제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꼬마 동생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곤 엄마를 찾았다.

나는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바다로 ‘풍덩’ 빠졌다.


해수욕을 끝내고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꼬마 형제는 아직도 흙 놀이가 한창이었다.

자기 몸에 흙을 얹고 있는 꼬마 형.

내 시계에 꼬마 형제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순간, 어릴 적 흙을 깊게 파지 못해 울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던 생각이 났다.

‘아무리 MZ가 이런 걸 싫어한다지만, 흙 놀이를 어떻게 참아? 이건 한국인의 정이야 정.’

나는 꼬마 형제에게 다가갔다.


“형이 좀 도와줄까? 형이 땅 진짜 깊이 파줄게”

라고 말하며 꼬마의 어머님에게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머님은 ‘부탁드립니다…’ 라는 답장을 눈으로 하셨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파면서 ‘나를 묻어줬던 형님들도 어렸을 땐 다른 형님들이 묻어줬겠지? 어린아이를 위해 땅을 파는 남자들의 정은 시대를 초월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낀 정을 다시 나눠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를 묻어주던 형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이 꼬마들에게 따뜻한 기억을 선물하고 있었다.


금세 어린아이 목까지 오는 구멍을 팠다.

“누가 들어갈래?” 용감하게 형이 나섰다.

형에게 흙을 끼얹어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너 어머니 말 잘 듣는다고 안 하면 안 꺼내줄 거야~. 숙제 밀리지 말고, 양말 제대로 벗고!”

어머님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스마트폰으로 아이를 촬영하고 있었다.


꼬마는 목만 나와 있는 채로 ‘감쟈합니다~’ 감사 인사를 했다.

앞니가 없어서 발음은 샜지만, 감사한 마음은 새지 않고 내 마음에 들어왔다.

이 아이들이 내가 준 정을, 우리의 놀이를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하길 바랐다.


차로 돌아오면서 아까 라디오에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회는 차가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정을 주변과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묻지 마 범죄가 늘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작은 정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사람 간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따뜻한 정으로, 시선으로 주변을 돌본다면, 그 정과 시선이 내 옆사람을 감염시키고, 그 정이 그 옆에 사람들도 감염시켜 사회에 따뜻한 정 바이러스가 퍼진다면, 묻지 마 사건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다음에도 해변에서 땅을 파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면, 나는 또 그 아이들을 위해서 땅을 팔 것이다. 그 작은 정이야말로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니까.











 아참, 꼬마 친구 안 꺼내주고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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