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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VS 작가철학

by 빛날현

변명 좀 들어보이소~


겸손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잘난 것은 드러내기보다 넘쳐서 저절로 떠오를 때, 그때, 진가를 알아보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빅 데이터에 묻히기 좋은 세상에 나 하나쯤 묻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령 사고가 났을 때에도, 나 여기 있다고 혹은 밑에 깔려 있으니 구해 달라고 소리치지 않으면 봉변당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었다. 앞다투어 너도 나도 나서기 좋은 세상에 혼자 가만히 있는 건 꼰대들에게조차 인정받기 힘들었다. 그래서 꼰대에 속해 있던 나도, 나를 드러내는 세상에 가담하였다.


나에게는 팬티만 입고 대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실제 팬티만 입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단점을 혹은 나의 자격지심을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대화중 이런 얘기를 했다. 나의 어떤 글에서 특권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다고.

잉? 뭐야? 난 반문한다. “야! 내가 특권이 있어야 드러내든지 말든지 하지.” 나의 답을 예상했다는 듯 친구는 찬찬히 예를 들어 풀어낸다. 삶에서 배어 나오는 자연스러움과 그 자연스러움도 의식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경우를.


이 고민을 시작한 지 불과 하루가 지나고 같은 직업군에 있는 후배에게도 넌지시 물어보았다. 물론 후배답게 전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럼 그렇지, 직업군 때문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배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한다. “언니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브런치 작가 소개를 보고, ‘뭐야? 목동 산다고 자랑하는 거야?’라든지 교수라고 홍보하는 거야?’라든지. 나도 몰랐는데 내 친구한테 언니 브런치 글 추천하면서 보여줬더니 그러더라고.” 헉. ‘야!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진작 얘기해 줬어야지.’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내뱉지는 못하였다. 얘기했다가는 ‘이 언니,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거야?’하는 의문을 주기에 충분했다.


맞았다. 똥과 된장을 구분 못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내가 왜 그렇게 썼을까를 되짚어 봤다. 작가소개란에 그렇게 버젓이 써놓고 정작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작은 기억 하나를 찾았다. 나는 내 필명으로 검색이 되길 원했었다. 그러니까 난 맛도 안 들고 시기부터 하고 있었던 거다. 친정 엄마가 유년 시절부터 가끔 하셨던 말이 있다. ‘그러면 김치가 맛도 안 들고 시기부터 한다고. 뭐든 단계별로 하는 게 좋은 거라고.’

맛도 들기 전에 나는 작가명이 검색되기를 바라는 허황된 꿈을 꾸었나 보다. 쓰는 지금도 부끄럽다. 그러나 ‘빛날현’이라는 필명은 이미 존재했고 다시 바꾸기엔 번거로워서 목동을 앞에 붙였었다. 다시 생각해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참.. 이 얼마나 우스운지.. 한참을 얼음이 된 채 창피함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내가 나에게 준 이 수치심은 큰 틀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것이 작가의 철학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악은 그저 글자였다. 그 누구도 장단점을 구별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브런치의 문화는 칭찬과 응원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믿을 수 있는 건 라이킷 수도 댓글 수도 아니었다. 그런데 두어 달 전, 한 작가님의 댓글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해이 작가님의 댓글 중


위의 해이 작가님​​의 댓글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아니, 작가라고 이름 붙이기에 철없던 빛날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저 나를 또 가라앉힐 뿐이었다. 나를 침잠시키자 내가 좋아하는 방향이 보였다. 내가 처음 글을 썼을 때 말하듯 쓰며 숨소리조차 글에 함께 넣고 싶어 했던 마음을 기억해 냈다. 숨소리의 길이까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도.


그 마음이 생각나자 곧바로 작가 소개란을 바꿔 쓸 수 있었다.


말하듯 노래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요리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좋아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나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나의 방향을 정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우연이 나를 돕고 있었다. 바로 배대웅 작가님의 글쓰기 세미나 모집이었다. 작가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며 생각을 공유하는 것만큼 유익한 일이 또 있을까. 내게는 그것이 최고의 영양제이리라 확신했다. 세미나를 신청하고 시작 전 배대웅 작가님의 발제문을 받아보았다. 헉. 감동이었다.

https://brunch.co.kr/@woongscool/297


정치인에게 정치철학이 있고,
기업인에게 경영철학이 있듯,
작가에게는 글쓰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
-배대웅 작가님의 발제문 첫 문단에서-


발제문 첫 문단에 작가의 철학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은 얼마 전 혼자 몸서리치게 창피했던 나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본을 안 하고 넘어가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이런 기본을 지킨다는 건 큰 틀을 볼 줄 아는 것이고, 성장 가능성이 무한한 사람들의 특징이라 단언한다.

더구나 나는 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만의 향기가 혹은 색이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 그러니 작가는 더더욱.


철학은 보통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철학(哲學)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출처:국어사전)


이 철학은 학문을 공부하고 그 징표로 쓰는 학사모에서도 알 수 있다. 학사모가 사각인 것은 중세시대 대학을 이끌었던 네 가지 학문인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을 뜻하는 것이며 그래서 대부분의 학문은 철학에서 만나는 것이다. 지금은 세부 전공으로 박사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예술, 인문학, 경제학, 경영학, 미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의 뿌리는 철학이다.


보통 수학은 독립되고 어려운 학문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수학도 놀이에서 출발하였다. 역사적으로 수학의 기원은 수(counting)·형태(pattern)·측정(measure) 같은 일상적 활동, 즉 놀이와 같은 단순한 탐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수학자들이 언급한 내용이다. 그러니 수학도 뿌리는 인간의 삶의 근본인 철학인 것이다.


또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볼로냐, 파리 등)에서는 철학부(Faculty of Philosophy)가 모든 학문의 기초 과정으로 신학, 법학, 의학 등 전문 학부에 진입하기 전단계이자 공통 기반이었다. 고로 인문학뿐 아니라 예술, 미술 등 인간을 위한 모든 학문은 철학에 근거를 둔다는 말은 단순한 인문주의적 감상이 아니다. 철학이 모든 인간 중심 학문에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철학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나의 글쓰기의 철학을.

독자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유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쉽게 읽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말하듯 노래하는 가수처럼

말하듯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배대웅 작가님이 칭찬하신 다음 문장을 생각해 본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위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쓴 영화 기생충에 대한 한 줄 평이다. 이 한 줄은 당시 현학 논란을 일으켰던 문장이다. 극찬하는 작가들과 굳이 어려운 단어를 찾아 쓰는 심리는 일종의 과시욕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했다.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가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아니 어떻게 바꿔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인생의 굴곡을 사회적 시선으로 신랄하게 드러내어 처연함을 느낄 수 있는 계급 우화


감히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문장을 고쳐 쓰고 생각해 본다. 글이라는 것이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일까?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언어는 작가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철학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단지,

방향성이 있어야 나아갈 수 있을 뿐.


나는 오늘도 성장한다.

작가로서의 성장 방향이 나의 심령과 일치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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