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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23. 2024

너를 좋아해

서울특별빌라 시리즈 2 (312호의 시점)

'너를 좋아해.' 내 마음에 이 문장이 두둥실 떠올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바코드 찍는 아르바이트 생이 아니라 핑크빛 바다 속 하트를 캐내는 해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화려한 세계 속에 있었다. 이 기분을 자각하고 나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네게 어떻게 이 마음을 전달하면 좋을지 상상하느라 오후를 다 보내게 되었다.


퇴근 후 나는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네게 메신저가 오지 않은 지 약 3시간쯤이 되었다. 소위 썸을 타는 사이에서는 꽤나 긴 시간이지만, 나는 쿨한 도시 여자로서 이 정도의 텀을 허용해줄 수 있었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리지만, 몸을 비틀어가며 너의 연락을 기다리지만, 정신은 평온히 너를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소위 차도녀니까.


계속 침대에 있으니 몸이 근질거렸다.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너에게 연락을 할까 잠깐 망설였다가, 입력 란에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오늘 저녁에 뭐함 ㅋㅋ?'까지 메신저를 친 다음에 보내기 버튼에 손이 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 누르지 않았다. 나는 공주니까, 복도 위를 걸어가는 서울특별빌라의 슈퍼모델이니까, 나는 절대 먼저 연락해선 안 됐다. 나는 너의 연락을 다시 기다렸다, 탑에 갇혀 왕자님을 기다리는 라푼젤처럼.


그때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 오늘 저녁에 뭐해요?' 연하다운 존댓말에, 누나라는 호칭까지 금상첨화였다. 나는 이미 수백번 비틀어댄 몸을 움직여가며 잠깐 만세 자세를 취했다. 아 나의 실수가 하나 있었다. 메신저 창에 계속 머무르느라, 바로 읽음 표시가 떠버린 것이었다. 공듀 자격 상실의 위험이 있었다. 위기상황이었다. 나는 얼른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대사를 쳤다. 'ㅋㅋㅋㅋ 뭐야 마음 맞았다.' '나도 너한테 오늘 저녁에 뭐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올' 등 대사를 통해 자존심을 조금 버려가며 위기상황을 탈출했다.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더하니, 꽤나 만족스러운 대처라고 생각이 들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는 너와 메시지를 계속 나눴다. 저 멀리 경기도 안양에서 통학하는 너는, 오늘 조별과제 때문에 오후 내내 서울특별대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썸녀인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당연히 파스타를 먹고 싶다고 대답을 하고(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다른 어떤음식이 어울리겠는가?), 누나인 내가 호탕하게 밥을 쏠 테니 너는 카페를 쏘도록 하는 대사를 쳤다. 불가항력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밥을 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내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더해서 너의 마음을 홀리고 나서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깔깔깔 마녀처럼 웃어버렸다.


그때였다. 깔깔깔에 맞추어 일렉 기타 소리가 났다. 띵~ 기타 튕기는 소리가 익숙한 천장 방향에서 났다. 내 윗집이었다. 감히 방음 안 되기로 유명한 서울특별빌라에서 기타를 치는 행위를 저지르다니, 주민들을 대표하여 나는 응징하여야만 했다. 나는 이래뵈어도 회계사 준비생이었다. 그를 응징할 도구는 책장에 넘쳐났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갔다. 의자의 균형이 살짝 불안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세법 개론 양장판 책을 들고는 윗집 천장을 향해 내려쳤다, 아니 올려쳤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쾅쾅쾅 하는 소리에 기타 소리가 멈췄다. 벙 찌는 듯한 기운이 윗집에서 스멀스멀 내려왔다. 나는 이번에는 용케 소리를 내는 것을 참고, 무음 모드로 웃어댔다. 그러게 누가 공동주택에서 기타를 치는가! 감히 공동생활의 지엄한 룰을 어긴 자, 나 이지연의 번개를 맞을지어다.


옆집 313호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 313호 찌질남은 내가 얼마 전 서울특별빌라를 뒤집어둔 우산도둑을 붙잡고는 그에게 응징을 가한 이후로 나에게 미묘한 존경의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우산도둑 때문에 한동안 편의점 비닐우산을 사서 집안에 들여놓는 수고를 해야 했기에,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 호연지기로 그를 붙잡은 다음, 그의 우산을 갈기갈기 가위로 잘라 그의 집 앞과 복도에 늘어놓는 것만이, 그 우산을 보고 공동생활의 룰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만이, 그에게 적절한 처벌이었음을 나는 확신하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특별빌라의 경찰이 되어, 그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박수 소리도, 찌질남의 존경도 중요치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썸남, 김지호를 만나러 나 이지연이가 지금 꾸며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나는 옷을 얼른 옷장에서 꺼냈다. 이때를 대비하여 땡땡블리에서 주문한 특제 파란 원피스에, 초록 자켓을 침대 위로 던져두었다. 그리고 곱창밴드로 묶었던 머리를 얼른 감아버리고, 안경을 벗어던지고, 렌즈를 꼈다. 그리고 얼굴에 적당히 파운데이션, 컨실러 등을 발라 잡티들을 없애고, 선이 나와야 하는 곳은 적당히 그려 넣어 내 미모를 더욱 아름답게 꾸몄다. 나는 생각했다, 김지호 이 자식 복 받은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를 생각하면 내 심장도 뛰기 시작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먼저 고백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고백은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닌, 귀로 듣는 것이었다. 도시 여자 법칙 제 1조 2항에 적혀 있는 규율이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방문을 열고 나서기 전에 집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내 방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회색 벽지에 옷으로 늘어진 침대에, 다시 일렉기타를 치기 시작하는 윗집까지, 서울특별빌라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풍경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지금 김지호를 만나러 가니까, 내 세계는 서울특별빌라가 아니라 김지호, 그가 될 테니까 말이다. 나는 회색 세계가 아닌 화려한 세계에 머물테니까 말이다.


저녁이 되었다. 6시 반이었다. 그와 내가 마주 보고 당연스레 파스타를 먹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 그는 나를 바라보고, 파스타는 무조건 포크로 칭칭 감은 채 입에 넣어두고, 오물오물 열심히 우아하게 씹어대고, 그리고 웃을 때는 조신하게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어대었다. 나 이지연, 내숭 떨 때는 내숭 떨 줄 아는 멋있는 여성, 정말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기개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는 수줍은 웃음을 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알에는 이미 나에게 반했다고 적혀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는 그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감상하였다.    파스타를 약 1/3정도를 남기고는(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집이었다면 먹어 치워버렸을 텐데) 우아한 손놀림으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일필휘지로 싸인란에 '이지연'을 휘갈겨적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뒤돌아서, 은근슬쩍, 아니 사실은 대놓고 다가가서 팔짱을 꼈다. 어떤가? 나란 여자 꽤나 멋지지 않은가?


카페에서 그는 어안이 벙벙해보였다. 고작 팔짱 정도에 이렇게 핼쑥해지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얼음을 씹어대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의 귀여운 모습과 내 우아한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꽤 잘 어울렸다. 우리는 카페를 벗어나 공원으로 갔다. 공원을 걸어다니며,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손을 잡았으며(요즘 시대 썸이란 이런 것이다.), 벤치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그 말, '너를 좋아해' 말이다. 한 30분 만이었다. 두문불출하던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반년처럼 느껴졌고, 그의 입술이 오물오물 어영부영 움직이던 시간은 반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그 말이 나왔다. 그 말 '너를 좋아해' 그리고 나의 대답 '나도 너를 좋아해' 말이다. 이 누님을 좋아한다니 승낙해주어야만 했다.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조용한 벤치의 가로등을 다 켜버렸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속도는 독일의 속도제한 없기로 유명한 고속도로에서조차 속도위반 딱지를 받을 정도로 빨랐다. 내 입술과 그의 입술이 부딪힐 때의 순간은 우주가 태어나던 빅뱅과 같이 폭발하였다. 나는 그 순간에 다시 태어남을 느꼈다. 계속해서 강조해온 우아함을 모두 버린 채로, 시크한 컨셉은 집어던진 채로, 순전히 사랑을,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느꼈다.


그 이후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아무래도 흘러가는 강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것처럼 급하게 흘러갔다는 점 말고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와 한 잔, 아니 여러 잔을 마셨던 것 같다. 칵테일을 배가 남산만큼 차오르도록 먹고는 그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아쉬운 작별을 나눈 이후로, 내가 움직인 장면들은 압축되어 잠깐씩 포착될 뿐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서울특별빌라 근처 언덕(명칭은 '산'이지만), 서특산 정상에 있었다.


내가 왜 산 정상에 있었는지는, 알만하다.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부끄럽지만 아무도 없는, 인적 드문 곳에 가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보통 감정이 격해지는 날이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서특산 정상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는 하였다. 윗집 기타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날에는, 세법책으로 윗집 천장을 쾅쾅 쳐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어서, 서특산 정상에 올라가 "기타 작작 쳐 시×롬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하였다. 그렇게 내 감정과 서특산은 각별한 관계였다, 실과 바늘처럼 말이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 내가 외칠 문장은 자명했다. 네가 나에게 말했던 말, 오늘 내 마음속이 두둥실 떠오른 말 말이다. 나는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대어 확성기 모양을 만들고 소리쳤다. '너를 좋아해, 김지호!!!' 모든 것이 잠잠해져만 갔다. 이제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밤중에 오르락 내리락하니 취기는 가라앉았고, 내 화려한 세계, 김지호에 대한 열망도 잠시 가라 앉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너에 대한 생각으로 일어나, 너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생각하며 시리얼을 먹고 가방을 챙겨 등교하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파랑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곱창밴드로 머리를 묶은채였다. 어차피 학교에 가서 잠시 수업을 듣는 것 뿐인데 예쁘게 입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내 미모를 굳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수업을 방해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도도하게 회색 방을 걸어나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슬쩍 돌아서 내 방문을 보니, 세상에 A4용지가 붙어 있었다. 휘갈겨 쓴 글씨로 쓴 내용이라 함은 '고시오패스야 기타 좀 쳤다고 책으로 천장을 쳐? 미쳤네' 였다. 메롱 그림까지 열심히 그려놓은 채였다.


이후의 몇 시간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어제와는 좀 다른 느낌으로 시간이 압축되어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로 손발이 떨려왔다. 감히 나 이지연이의 조치에 반발을 해? 그리고 감히 휘갈겨 쓴 글씨로 나에게 반기를 들어? 그리고 감히 어쩌구로 이어지는 분노의 물음표가 나의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계속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고, 그 종이쪼가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혀 집중하지 못하였다. 나는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 한 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멋쩍게 되었으며(고작 한 번 말이다), 곱창밴드로 묶은 포니테일을 분노의 표시로 흔들어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매직펜 세트와 테이프를 손에 든 채였다.

나는 집 문에 붙어 있는 종이를 떼서 뒷면에 글씨를 적었다. '나도 휘갈겨 쓸 테야!'라는 기세로 적어대었다. 내용이라 함직은, '그러게 기타를 왜 침? 또라이신가?'였다. 왜침을 막아내던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소리없이 윗집을 향해 외치었다.(공동생활에서 악다구니를 하는 것은 품위에 어긋나니까) '기타를 왜 치냐 그러게? 또라이자식아’

나는 윗집, 412호로 위풍당당하게 향하였다. 안에 사람이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 종이를 붙일 것이고, 그에게 엿을 맥일 작정이었다. 종이를 윗집 문에 붙이고 난 다음에, 나는 무언가 미완성인 느낌이 들어 종이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딱치고는, 맨 끝에 엿(ㅗ) 을 그려넣었다.


모델워킹으로 도도하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중에,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미친년아!, 네가 책으로 천장 쳤잖아. 인정해 안해?"

412호 남자였다. 상상보다 더 거대하고 우람한 체구였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나 이지연이는 절대 굴종하지 않았다. 뒤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잠깐 들고는, 우아하게 돌아선 다음, 나도 소리쳤다.

"응 엿드세요. 누가 기타 치래?" 나의 우아한 대처에 서울특별빌라 주민들은 경악했을 것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거대한 남자여도 여자를 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법이 지엄하고, 파출소는 100m 안에 있었으니, 연약한 여성도 겁먹지 말지어다! 세상 모든 여성들은 호탕한 여자 이지연을 따르면 될 따름이었다.


앗, 윗집과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김지호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김지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잠깐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꺼냈다. 너는 애교섞인 목소리로 "누나 보고싶어, 오늘 저녁에 뭐해?, 우리 밥먹자"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대답하였다. "그래, 누나가 쏜다!", 매우 관대한 처사였다. 이틀 연속 밥을 쏘는 것은 차도녀 법칙 3조 1항쯤을 위반한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윗집과 내 이미지 모두에게 빅엿을 날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또 하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를 많이 좋아해', 윗집에서는 쯧쯧대는 소리와 "어우, 미친년"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김지호와 식사를 하기 전에 집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는 수요일 오후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다. 앞치마를 입고, 바코드를 찍어주고 미소를 지어주는 것은(손님들을 홀려버릴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내 취향과 격에는 걸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은 퍼레이드에서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짓는 건데, 이런 내가 바코드를 찍으며 손님에게 미소를 짓는 일이라니! 정말 분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미소를 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래 뵈어도 나는 프로의식이 넘치는 수요일의 아르바이트생, 이지연이었다. 그리고 수요일 오후의 수행은 나를 일깨워주는 주간 행사이기도 하였다. 내가 열심히 공부할 이유를, 회계사가 되어 아랫것들을 굽어살펴주는 삶을 상상하는 여유를, 잠깐 주는 것이 편의점 알바의 매력이기도 했다.


나는 오늘 아르바이트에서는 구 썸남이자 현 남친, 김지호를 상상하느라 오후를 다 보냈다. 손님들이 무얼 결제하든 나는 김지호의 얼굴을 바코드에 찍고 있었고, 멋있는 옷을 입고 나타날 그의 얼굴을 상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 그 문장이 다시금 내 마음 속에 떠올라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참았다. 나는 프로의식 넘치는 아르바이트생 이지연이니까. 아무리 ‘너를 좋아해’라는 문장이 입에 맴돌아 힘들어도 참아야만 했다. 그것이 프로의 세계, 회색 현실의 세계였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김지호와 초밥을 먹었다. 그의 입속에 초밥 하나를 집어넣고, 그가 "어우 누나 왜 이래"하며 오물오물 씹어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소가 물씬 지어졌다. 나는 그가 좋았다. 서특산 해발고도보다 더 그를 좋아했다. 어쩌면 윗집 일렉 기타 소리보다 더 크게 그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그와 또 카페를 가고, 공원과 학교를 산책하고, 같이 공부를 하였다. 같이 공부를 하고, 시험기간에 초췌해지는 모습도 바라보았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눈빛이 맞으면 술집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점점 꾸밈이 적어졌고, 말은 더 솔직해졌으며, 시간을 흘러만 갔다. 가을이 되었다. 윗집은 여전히 기타를 쳤고, 나는 윗집과 펜팔친구처럼 서로의 집에 편지를 가장한 욕지거리를 적어두었고, 김지호와의 연애에서는 행복을 얻어갔다. 낙엽이 져가고 있을 때쯤에, 내 감정은 더욱더 커져갔으며, 나는 가끔 서특산 정상에 올라가 소리쳤다. "김지호, 너를 좋아해"


물론 그와 다툰 날도 있었다. 그와 다투는 날은 지옥의 강림과도 같았다. 초침은 지게를 지고 나아갔으며, 분침과 시침은 시침떼기가 되어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나는 그와 다툴 때마다 그의 존재를 잃게 될까 더욱 예민해졌고, 윗집 일렉 기타 소리에 서슬퍼런 욕지거리를 했으며, 그의 메신저를 일부러 읽지 않고, 읽고도 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옥은 여전히 지옥으로 남을 뿐이었다. 침묵은 나를 괴롭히는 악마가 되었고, 다툼은 나를 위해 마련된 용암탕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금방 화해하였다. 그는 항상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내가 메신저를 읽지 않으면, 내 방문을 두드렸고, 밥을 먹지 않으면, 음식을 포장해와 나를 감동시키던 게 그였다. 나는 점점 커져 가는 그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참지 못해, 혼자 칵테일을 들이키고는 서특산에 올라가는 날이 많아졌다. "너를 좋아해, 김지호" 그렇지만, 아무도 이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그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회색 세계는 나를 가끔 괴롭혔다. 내가 머물고 싶은 세계는 김지호였다. 그 세계는 화려함과 사랑,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마련되어 있는 세계였다.


그렇지만 서울특별빌라의 회색 복도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현실의 구질구질함은 나에게 실제로 내가 있는 세계가 회색 세계라는 것을 일깨우고는 하였다. 김지호와 가끔 화려한 세계를 탐방하고 나서는 항상 회색 세계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고, 서울특별빌라의 칙칙한 조명과, 이웃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나의 사랑스럽고 시끄러운 이웃들은 나를 현실로 환영해주는 회색 카펫이 되었다.


나는 심술궂었다. 나는 우아하기도 하고, 사랑에는 충직하였으며, 자신이 넘치는 여성이었지만, 나를 괴롭히는 회색 현실은 심술궂이가 되도록 나를 부추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할 때도,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가끔 원망스러워, 가끔 이유 없이 그를 탓하였다. 나는 그와 이유없이, 여유없이 다투는 날이 많아졌고, 화려함의 세계는 아이스크림 케이크처럼 녹아내렸다. 그와 나는 점차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워졌고, 그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꿈이었을까? 그를 잃는 악몽을 꾸는 날에는 침대 시트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그가 없어지면 내 축축한 회색 방에 남겨져야 한다는 것이, 윗층의 일렉 기타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서글퍼졌다. 그를 잃는 생각을 한 번 하면, 곧이어 두 번이 되고, 다음날에도 악몽을 꾸고는 하였다. 점차 내 화려한 꿈을, 회색이 범벅이 된 현실세계가 침범해 왔다.


어느 날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함정이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바닥은 핑크색이었고, 서울특별빌라는 궁전이 되어 있었다. 개꿈이었고, 내 인생의 함정이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꿈속에서 그와 싸웠다. 내 작은 황금빛 방 안에서였다. 너는 검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고, 나는 분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너와 다투다가 네가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을 들었다.

"누나 나를 좋아하긴 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했다. 아주 크게 말이다.

"세상 무엇보다 너를 좋아해, 김지호!!" 이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서울특별빌라의 방음이 안되는 복도로, 엘리베이터로, 창밖으로, 나의 문장이 새어나갔다. '너를 좋아해'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졌다. 내 모든 피부가 자두가 된 마냥 붉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집 밖을 나서는 중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는 없었다. 감히 윗집 일렉 기타 새끼가, 나를 놀리려고 수를 쓴 것이었다. 내 방문 종이에 적혀있던 내용이라 함은,'너를 좋아해 에베베베, 너무 시끄러워요 ㅜㅜ' 였다. 나는 순간 펄썩 주저앉았다. 우아함과 차도녀 이미지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내 마음을 일렉 기타 자식이 놀려먹는 게 너무나도 분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시 주저앉는 것 뿐이었다. 역린을 찔린 용과 같은 처지였다. 회색 세계와 화려한 세계가 부딪혀 같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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