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이다. 나는 꼭두각시 인형이다. 내 조종간에는 누구의 손도 아닌 세계 자체가 걸려있다. 깨달음이 내 몸을 밀어낸다. 파도가 등을 덮치는 듯 모래에 머리가 쳐 박힌다.
깨달음의 원류에는 검열관 동지가 있다. 내 가장 오래된 친구인 검열관 동지를 설명하자면, 친구들과 내가 어울릴 때마다 질투심에 ‘이런 행위를 해도 될까? 이 말이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하며 궁시렁대며 내 마음에 떠오르는 온갖 어휘를 검열하며 창고에 쳐넣는 친구이다. 어느모로 보나 검열관 동지는 유쾌함과는 항성 간 거리만큼 떨어져 있지만, 나는 검열관에게 동지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어차피 내 마음에 같이 살아가는 존재인데 내가 친근하게 부르든, 혹은 소비에트식 화법으로 ‘검열관 동지! 금일 어휘 제한은 78개로 목표를 40 뻐센뜨 초과 달성했습네다!“하고 과장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나는 검열관 동지에게 평소에 된통 당하고 행동을 제한당하기 일쑤였지만, 오늘은 검열관 동지를 골려주기로 했다. 내 마음에 현미경을 대고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검열관 동지의 등 뒤에 현미경을 대고 그가 하는 행동을 다 쳐다보며 어떤 방식으로 검열관 동지가 일하는지 지켜보고, 그를 겸연쩍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10분 정도 지켜보다 이내 큰 충격에 빠졌다. 검열관 동지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을 여기까지 본 독자들은 이게 무슨 생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이는 실로 중요한 발견이다. 내가 놀이삼아 내 마음을 검열관 동지로 명명했다지만, 내 마음이 내 마음과는 다르게 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반역이다. 기절초풍할 일인 것이다. 나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만 움직이면서, 주인의 마음을 무시하는 검열관이 미워, 반대편에 있는 내 바람과 행복을 들여다 보았다. 사계절 내내 봄인 작은 정원에 있는 대갈꽃밭 친구는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고 하루종일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싫증이 날때쯤 꽃을 꺾어 편지지를 장식하고 거기에 자신의 행복을 적어 검열관 동지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대갈꽃밭 친구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찢어버리는 것이 검열관 동지의 일상임은 말해 무엇하랴!
대갈꽃밭 친구와 검열관 동지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내내 편지를 가지고 아웅다웅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다가 내 마음이 어디부터 꽃밭이고 검열부인지 헷갈려 둘 사이의 경계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내마음은 경계가 없이 꽃밭과 겸열부와 기타 등등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마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이를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내 통합된 자아로 생각한 것이 하나의 마을이라니, 내 자유의지는 없었고 나는 마을의 생리로써 생각을 배출할 뿐이라니!
돌이켜보면 생각을 한다는 말은, 해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주변에 생각을 해냈다고 자랑하는 순간 생각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과 딴지를 동시에 듣기 마련이다. 생각은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떠오르는 것이다. 한 마을의 생리로 대갈꽃밭 친구의 소풍이 벌어지기도 하고, 검열관 동지의 철권통치가 자행되기도 한다. 떠오르는 생각은 그 와중에 나오는 것으로, 절대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생각을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은 떠오른다. 바다 위로 심연의 사체가 둥둥 떠오르듯이 생각이 떠오르는 장면은 살풍경한 모습이다. 인류가 스스로의 오만을 집어던지고 자신이 그저 꼭두각시임을 고백해야 하는 순간이, 생각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생각이 떠오르자면, 자유의지가 없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교과서도 책도 모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단 것을 증명하는 실험을 서술하였다. 그렇지만 그건 그저 알고 있을 뿐이었고, 하나의 체험으로 깨달음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오늘 검열관 동지와 대갈꽃밭 친구를 지켜보고 든 생각은 깨달음이었다. 어리석은 동물이여! 깨달음을 얻을지어다! 인류에게 자유의지는 없고, 우리 모두는 무의미하도다. 허무의 칼바람은 피부를 에이듯 스칠 것이니. 난 세계에 대해 알기를 원했으면서도 정작 깨달음에는 대비하지 못했다. 책을 가십잡지를 읽듯 가볍게 읽는 자에게는 깨달음의 번개가 내리꽃힐 뿐이다.
나는 꼭두각시가 된 것에 망연자실하다가, 어느 순간 현미경을 눈에서 뗐다. 현미경을 눈에서 떼자 내 마음은 다시 하나의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안심하고 앞으로는 다소 무지하기로 하였다. 무지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줄 방법임을 깨닫고 만 것이다.인류는 멸종의 순간까지 무지하여야 한다, 어느정도로는. 그것이야말로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