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ELJAZZ May 22. 2024

사자 앞 사슴

소설처럼 쓴 에세이

"A님은 사자 앞 사슴 같은 상태입니다. 사자 앞에 있는 사슴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어떻게 되나요?"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으로 피가 이동합니다. 소화는 잘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지, 음식물을 소화시킬 때가 아니거든요."


"소화가 잘 되지 않기는 해요. 계속 얹히고, 장도 안좋아요."


"네, 그런 증상 또한 연관이 있지요. 이런 긴장 상태가 계속된다면 몸에 무리를 주게 됩니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지고, 손과 발이 차가워집니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어쩌면 환청, 환시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감각이 좋기는 한 것 같아요. 예민하다는 소리, 눈썰미가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거든요."


"네. 아마 그런 증상도 이와 관련있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계속해서 긴장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기는 하네요.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거나, 일을 할 때에 어깨가 굳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거든요. 또 자주 소화불량과 수족냉증이 생기기도 해요."


"네, A님이 신체화 장애라는 병명을 얻었지만, 중요한 것은 메커니즘이 긴장 혹은 불안과 관련있단 걸 인지하는 겁니다. 이를 우울증이라고 명칭하든, 신체화장애라고 명칭하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아. 그렇군요."


"따라서 A님의 신체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긴장을 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긴장을 풀 수 있을까요? 명상을 해야 하나요? 아니면 운동이 답인가요?"


"차차 알아보아야지요. 저와 상담하는 세션에서는 A씨의 마음이 작동하는 기제를 알아보고, 이를 활용해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배워볼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두 번째 상담 세션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초식동물의 비유를 들었다. 나는 이 비유에 마음이 동했다. 스스로도 생각해오던 바였다.


사자 앞의 사슴처럼 나는 항상 긴장하고 있다. 마음이 긴장하고 있으니 몸도 긴장하게 된다. 잠시 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긴장상태가 계속되니 몸이 망가진다. 몸이 망가지면 기분이 망가진다. 부정적 피드백이다. 이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선 나의 적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것이 먼저다. 나는 사자 앞에 있다. 나는 이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자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이를 알아내지 못하면 나는 사자 그림자에 긴장하는 멍청이가 된다. 나는 사자를 직시해야한다.


사자는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과거 원시 시대의 사자는 포식자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자였을 수도 있다. 사자는 내 조상을 위협했고, 그들이 긴장하게 했다. 무시무시한 이빨에 내 조상들은 심장이 뛰고, 근육에 혈액이 집중됐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포식자는 죽었다. 지금의 포식자는 오히려 나다. 내 식탁에 오른 동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먹힐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나는 두 손으로 사냥하지 않는다. 나는 발을 굴러 도망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도망칠 수는 있다. 저번 회사에서의 탈주가 생각난다. 나는 사직을 표하고 도망쳐나갔다. 서류 더미들이 두꺼워서, 사무실에 사람이 많아서, 전화줄은 길고 메신저는 가득해서 그만두고 싶었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았다. 과거의 망령은 내 근육을 긴장시켜 나를 가라앉게 했다.


그렇다면 사자의 정체는 사회이다. 지나치게 복잡해진 인간의 사회 자체가 사자이다. 나는 마천루가 가득한 길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건물 창 하나하나들 너머 사자가 잠자고 있다. 사회는 정글이다. 상사와 시스템은 사자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고 있으면 사자는 나를 쳐다본다. 내 자리 건너 상사는 내가 일을 잘하는지 가늠하고 있다. 대각선 방향의 상사는 딴짓을 하며 직원들을 둘러보고 있다. 나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손가락을 놀린다.


또한 내 일도 사자이다. 메신저가 울린다. 메신저가 울리자마자 새로운 메신저가 울린다. 머리가 그들의 요구사항으로 가득찬다. 하나를 처리하고, 또 하나를 처리하다보면 전화가 삐리릭 울린다. 머리에 새로운 요구사항이 입력된다. 요구사항끼리 우선순위를 다투다 손가락에 실수가 난다. 대각선 방향의 상사가 슬쩍 나를 쳐다본다. 내 위장이 경직된다.


일을 끝내고 친구를 만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또한 사자이다. 그들이 누군가를 욕하면 나는 '누군가'가 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도 정글과 같다. 웃는 얼굴로 정글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정한 휴식은 잠을 잘 때에야 찾아온다. 망가진 자율신경계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기는 하지만, 의사가 처방해준 알약 몇 정이 수면을 돕는다. 눈꺼풀을 감으면, 사자는 없어진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다. 내 마음을 차지하던 거대한 사자 무리가 장막 뒤로 사라진다.


눈꺼풀 뒤에서 내 정신은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다시 상담 세션에 참가한다. 무한히 내 무의식 안에서 반복된 세션이다. 의사와 나는 마주한다. 의사는 눈을 똑똑히 뜨고 나를 지켜본다. 총명한 눈빛이다. 나는 그에게 나의 마음 상태를 보고한다.


"이제는 예전처럼 긴장되지 않아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렇게 말해주신다니 감사하네요. 그렇지만 이렇게 발전한 것은 A님이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입니다."


"네네, 선생님이 조언해주신 대로 하니, 이제 마음이 편해요. 돌아보니까 예전엔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신기하네요."


"네. A님이 연습을 많이 해주셔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상담 세션을 종료해도 될 것 같습니다. A님은 이미 충분히 배우셨어요."


"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제가 알려준 방법이 뭐였죠?"


나는 의사의 하얀 가운을 쳐다본다. 티 없는 순백의 빛이 나를 찔러온다. 하얀색은 점차 내 시야를 채운다. 하얀색은 커지고, 완전해지고, 무한해진다. 나는 꿈에서 깬다. 백색 새벽이다.


꿈에서 깨면 나는 다시 사슴이 된다. 사슴은 아직 불안을 푸는 법을 알지 못한다. 코 앞에 포식자가 있는데, 긴장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나는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과연 긴장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내 친구 B가 언뜻 생각난다. B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B는 쫄지 않는다. 욕을 먹으면 그러려니 넘겨버린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언젠가 B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욕 먹는 게 두렵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B는 대답했었다. "야, 내가 제일 중요해. 지들이 뭐라고 하든 뭔 상관이야?"


나는 B의 태도에 감탄하면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B가 그렇게 소신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은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나는 사슴이어도 B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B는 이전에 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그렇게 눈치보고 살지마. 어차피 인생은 마이 웨이야." 나는 인생이 지 멋대로만 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은 B가 모난 돌부리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걸어가는 데에 B가 방해가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 나처럼 남들의 눈치를 보다가 몸이 망가지고 기분이 더러워지느니 B처럼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쩌면 돌부리는 사람들이 넘어질 때마다 웃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인가? 행복한 돌부리인가? 불안한 사슴인가? 예전엔 사슴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을 바꿨다. 상냥하고 온순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을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리자고 다짐하였다. 버리지 않으면 몸을 버려버릴 테니까.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세상에는 짜증나게도 사자가 많으니까. 나는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사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가에서 물을 먹던 사슴에게 사자가 달려든다면, 사슴은 당연히 도망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신이 사슴이라 생각해서 도망치는 것이다. 어쩌면 물가에 비친 사슴의 반영은 돌부리일 수도 있다. 혹은 자기 자신이 사자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사슴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고 먹히지 않을 수 있을까? 사자는 강하고 사슴은 연약한데 말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지금껏 초식동물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육식동물이 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시도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차피 사슴이고 사자고 모두 비유니까. 스스로를 사슴이라는 한계 안에 가두는 것보단, 자신을 끊임없이 동정하는 것보단, 자신을 가지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를 명심한다면, n번째 상담 세션에서 변화하였다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이 찾아올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