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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19. 2024

11. 출근은 계속되어야 한다 #04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이것은 불굴의 출근 기록이다.


#4


프로젝트 끝나기 일주일 전 즈음 휴가를 위한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었다. 비행기 표와 숙소는 일찍 예약할수록 더 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프로젝트 종료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정확한 종료 일자를 90%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컨설턴트들은 보통 ‘휴가를 쓰지' 않고 ‘휴가를 받는다'. 정해진 휴가 일 수가 없고 참여한 프로젝트 기간에 비례하여 휴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날도, 끝나는 날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고객사와 체결하는 계약서에 시작일과 기간이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고객사 ‘대표님이 바쁘셔서' 시작일이 며칠 미뤄진다거나 ‘보고서 보완이 필요해서' 프로젝트 기간이 연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도 휴가를 바로 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프로젝트가 언제 시작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모월 모일에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다가 번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이렇게 불합리한 휴가 제도가 다 있나 싶지만 정작 그 구조 속에 있을 때는 일말의 이상함도 감지하지 못했다.


“저 프로젝트 끝나는 다음 주에 비행기 예약해도 돼요?”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어보는 1년 차 주니어에게 ‘조금만 기다려봐’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일은 안하고 휴가 계획만 세우는구먼'이라고 생각했지만 단언컨대 나는 꼰대가 아니라 회사의 가스라이팅 피해자였을 뿐이다. 믿어줬으면 한다.


2년차 주니어 컨설턴트 시절, 어김없이 프로젝트 말미에 비행기 표와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번 여행지는 좀 먼 곳이었다. 포르투갈.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이었기에 최종보고 날짜가 정해지자마자 비행기 표와 숙소부터 예약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후회했다. 최종보고 날짜가 밀린 것이다. 이 일을 2년이나 했으면 최종보고 날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최종보고 날짜가 정해져도 사흘쯤 두고 보다 팀장님께 확인을 받고 예약했어야 했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날은 다가오는데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다. 출국 3일 전, 결국 표를 일주일 미뤘다. 클릭 한 번으로 150만 원이 공중분해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 잘하는 게 인생 최대 목표였던 2년차 강단비에게는 150만원보다 프로젝트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룬 출국 날이 다가오는데 프로젝트는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긴장하면 손에 땀이 나는 탓에 축축한 손을 바지에 닦아가며 팀장님께 사실을 고했다.


“팀장님… 사실은 제가 비행기 표를 이미 예매해버렸는데요…”

“그래? 어쩔 수 없지, 갔다와.”


허락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야기 한 번 해볼걸. 공중에 날린 150만 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팀장님이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노트북 가져가고.”


인천공항에서 모든 짐을 위탁 수화물로 부치고, 노트북 가방 딱 하나만 가지고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단비, 엑셀 숫자 좀 고쳐줘. 숫자가 너무 작대.”


프로젝트 막바지인데, 이미 3주 전에 만들어진 숫자인데, 왜 이제 와서 그러시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객사는 갑이고, 컨설턴트는 을이고, 나는 그중에서도 일개 주니어 컨설턴트다. 따지는 대신 노트북 가방이 지금 내게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엑셀 파일을 열었다.


“네. 그래도 저 비행기 타기 전에 연락받아서 다행이네요.”


무슨 법칙 같은 게 있을까? 카페에서는 ‘오늘 손님이 별로 없네'라고 하면 그 날 마감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고, 병원 응급실에서는 ‘오늘 환자가 별로 없네'라고 하는 즉시 환자가 몰려온다던데, 입방정의 법칙 같은 건가? 슬프게도 업무는 인천공항에서부터 기내로 이어졌다. 운 좋게 업그레이드된 비즈니스석에서, 양 옆 승객들은 자거나 영화를 보는데, 내돈내산 기내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엑셀을 열심히 돌리는 기이한 경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국에서 독일을 경유해 포르투갈까지 가는 14시간 내내 서울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팀원들과 함께 일했으니 이 정도면 휴가가 아니라 출근으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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