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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27. 2024

13. 쓰러지지 않는 법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늘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남들과 비교하며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대학 입시 때도, 취업 준비 때도 그랬다. 다만 경쟁이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를 낼까 항상 고민하는 습관은 고객사에, 프로젝트에,  회사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내 주변인과 나에게는 딱히 도움되지 않았다. 엄마는 같이 사는 딸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남자친구는 늘 외로워했고, 친구들은 다 같이 모이기 어려웠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행동했고, 작은 실수에도 필요 이상으로 집착했다. 


무엇보다 나는 건강을 잃었다.


오랜만에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하던 날 아침이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컨디션 난조라고 생각했는데,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서 있기가 힘들어졌다. 속은 메슥거려서 토할 것 같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서 눈을 뜨는 것도 힘들고, 온몸은 덜덜 떨리면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손이 누군가를 치는 느낌이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딱하면 주저앉을 것 같아서 선 채로 손잡이를 꽉 붙잡고 있다 생각했는데, 0.1초 사이에 손힘이 풀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을 친 것이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내 상태를 확인한 그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준 덕에 앉을 수 있었지만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이대로는 출근길 지옥철 9호선 구토녀로 뉴스에 나올 것 같아서 지하철 문이 열림과 동시에 튀어나왔다. 무슨 역인지 파악조차 안 되었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기둥에 벽을 대고 앉았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지하철역 바닥에 누워 있었고, 내 앞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머, 이 아가씨 어떡해.”

“아가씨,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누가 119 좀 불러봐요!”


기절한 건 처음이었다. 오래 기절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구급차나 병원이었겠지.

지나가던 행인 분들의 호의로 냉수를 마시고, 휴지로 손을 닦고, 진정한 후에 지하철 역무원의 부축을 받으며 역무실로 가려는데 역무원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에스컬레이터가 다 멈췄는데, 걸어 올라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필 그날은 서울에 연일 폭우가 내려, 곳곳에 침수 피해가 난 이후였다.

“엘리베이터는…?”


고개를 젓는 역무원을 보고 체념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역무실까지 기다시피 올라갔다. 한참을 엎드려 119가 오기를 기다렸다. 119가 도착했을 때는 조금 진정된 후였고 그 자리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저혈압이 조금 심할 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진짜 119에 실려서 응급실에 간 것은 그날이 아니라,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틀 연속으로 쓰러진 것이다. 첫 번째 쓰러졌을 때는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지 몇 주가 되었고, 이전 프로젝트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좀 받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신경 쓸 일이 두 배로 늘었고, 입맛이 없어 밥은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 술과 커피는 줄이지 않았었다. 컨설팅하다가 백혈병 걸려서 퇴사한 사람도 있다는데 한 번쯤은 쓰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쓰려지니 나도 겁이 났다. 구급차에 누워서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몸에 진짜 이상이 있는 건가? 큰 병이면 어쩌지?’


그 와중에도 일 생각을 했다.


‘오늘 퇴근하면 그 일은 누구한테 맡기지? 내가 입원하게 되면 이 프로젝트 PM은 누가 하지?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는 건가? 그럼 나는 무슨 낙으로 살지?’


병원에서 진단한 병명은 미주신경성 실신. 요즘은 스트레스에 찌든 20대, 30대가 많이 걸리는 병이라고 했다. 신체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발병하는 것이 아닌 만큼 완치라는 개념도 없어서 살면서 언젠가는 또 쓰러질 수 있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오면 그냥 주저앉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무슨 이런 병이 다 있지’ 생각하며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그럼 안 쓰러지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잘 자고, 잘 먹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감에 걸려 병원에 갔을 때도, 건강검진에서 위염을 진단받을 때도, 마음이 힘들어서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도 들었던 말을 응급실에서 들을 줄이야. 당시에는 그 말이 어이없고 무책임하게 들렸으나 응급실에 실려간 날 이후로 오랫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러다 또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더 큰 병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럼에도 ‘잘 못 자고, 잘 못 먹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나의 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의 커리어, 나의 성과, 나의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이후, 출퇴근 길에, 집에서 야근하다, 몇 번은 더 쓰러지고 난 이후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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