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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13. 2024

09. 재밌어서요, 그냥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취업에 성공해 마냥 기뻤던 1년차. 아침 출근 택시를 타고 마포대교를 지나갈 때마다 다리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2년차.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동시에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던 3년차. 혼자 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며 자만했던 4년차. 팀원들이 없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5년차를 넘어 6년차 컨설턴트가 될 때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들었던 질문이 있다.


“단비님은 이 일을 도대체 왜 하세요?”

“힘든 일을 그렇게 오래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20년 넘게 컨설팅을 해온 직속 상사부터, 컨설팅을 경험한지 2주도 되지 않은 인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내 대답은 한결 같았다.


“재밌어서요.”


세상에는 다양한 직장인이 있고, 굳이 단순하게 분류하자면 ‘회사에서 재미를 찾는 직장인’과 ‘회사 밖에서 재미를 찾는 직장인’으로 나눌 수 있다. 나는 진정한 ‘직장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대학생 때부터 절대적으로 전자를 선호했다. 전자가 아니면 회사를 다니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중 5일(컨설턴트는 6일), 24시간 중 거의 3분의 1인 8시간(컨설턴트는 3분의 2)을 보내는 회사가, 그리고 회사에서 하는 일이 재미가 없으면 인생이 재미 없는 거 아닌가?


일이 재미있다는 건 도대체 뭘까? 회사에 가면 매일 만나는 동료들이 너무 좋아서, 구내식당의 밥이 맛있어서, 매월 통장에 월급이 쌓여서처럼 일 외의 것들로 인해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일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수도 있다.


일 하는 게 재미있다는 건 뭘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문제를 해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회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때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일에서 얻는 성취, 그리고 성취로 인한 보상에서 재미를 느꼈다. 내게 금전적인 보상은 일시적일 뿐 일에 대한 장기적인 동기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을 모두가 알고, ‘잘했다’라고 인정 받는 것, 그것이 나의 재미였다.


그런 면에서 컨설팅은 완벽하게 재미있었다. 이 일은 신기하게도 시간을 투입하는 만큼 결과물의 질이 정비례하여 상승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일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많이 쏟을수록 좋아진 결과물은 실시간으로 팀원에게, 상사에게, 고객사에게 평가를 받았다. 좋은 평가는 금전적 보상이 되어돌아오기도 했지만, 좋은 평가 자체가 보상이기도 했다.


재미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왜 그렇게 일을 사서 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쉬지 않고 일했다.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젝트가 생기면 손을 들고 나섰고, 장기 휴가를 갔다가도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기면 자발적으로 휴가를 중단하고 회사로 돌아갔다. 덕분에 열정인간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건강을 잃었다.


그 시절의 나는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90%를 회사에서 보냈으니 인생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회사 뿐이었으니 성취의 순간들이 1년 365일 이어지길 바랬다.


‘왜’ 하냐는 질문에 동반되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어떻게’ 그렇게 일하냐는 것. 일에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 외의 것에 눈 돌리지 않고 매번 전력질주 하듯이 전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들 했다.


답이 분명한 이전 질문과는 다르게 이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웠는데, 얼마 전 피겨 여왕 김연아의 예전 영상을 보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가끔 의욕이 없어질 때 김연아 다큐멘터리를 본다. 열심히 살고 싶게 만드는 신기한 영상이다.)


경기 출전 전, 몸을 풀고 있는 김연아 선수에게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 하세요?”

어이 없는 표정의 김연아 선수가 대답한다. 여전히 몸은 스트레칭을 멈추지 않으며.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맞다, 그냥 하는 거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말도 안 되는 양의 업무를 해야 할 때도 있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해야지 뭐… 어떡해.”


도무지 해낼 방법이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건 ‘일’이고, 하지 않을 방법은 더더욱 없다. 어떻게든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대신 억지로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목 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자듯이, 재미있는 일을 찾아왔기에 주어진 일을 ‘그냥’ 한다. 내 일이니까 ‘그냥’ 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에게 의지, 인내와 같은 단어는 적어도 회사 생활에 있어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게 아니어서, 내 의지와 인내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냥’ 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왜’ 일을 하고, ‘어떻게’ 일을 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고 보니 내가 ‘그냥’ 할 수 있었던 힘이 어쩌면 ‘재미’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해야 하는 일에 재미가 없으면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마련이니까. 주입식 공부와는 다르게 주입식 열정은 불가능하니까.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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