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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수 Feb 09.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序詩)

나는 왜 위험(危險)한 짐승일까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제1연에서 ‘나’를 ‘위험한 짐승’이라고 하는 까닭은 ‘너(꽃, 사물)’의 참된 의미를 잡으려고 내가 손을 뻗치는 순간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의 본질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

- 김흥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



관념적인 시이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크게 왜곡된 해설은 적은 편입니다.

다만, 첫 연의 ‘위험한 짐승’을 ‘사물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로 해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무지한’은 우리가 느끼는 ‘짐승’의 ‘폭력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 폭력적 이미지와 그 수식어인 ‘위험한’에 대해서는 아예 해설조차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위의 해설은 핵심을 짚었습니다만, 좀 더 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기 빨간 색의 꽃이 있습니다. 빨갛다고는 하지만, 표준적인 빨간 색과는 ‘오묘하게 다른 느낌의 빨간 색(본질)’입니다. 나는 그 ‘오묘한 빨간 색’의 정체를 밝혀 내려고 노력하지만, 그 오묘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으니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꽃을 그저 빨갛다고 말해 버립니다.

꽃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 그 ‘오묘한 빨간 색’을 만들기 위해, 표준적인 빨간 색에 0.1%의 파란색과 0.01%의 흰색을 섞는 등 아주 섬세한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 ‘오묘한 빨간 색’을 알아 주지 못하고, 그저 흔하디 흔한 ‘빨간 꽃’이라고 규정해 버리니 말입니다.


1연

‘내’가 어설픈 인식으로 ‘꽃’을 빨갛다고 말하는 순간(나의 손이 닿으면). 꽃이 가진 빨간 색의 오묘함은 사라져 버립니다(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그래서 꽃은 ‘나’에 의해 오묘함을 훼손당합니다. 어설픈 인식으로 꽃을 빨갛다고 규정해 버린 ‘나’는, 그 꽃이 가진 오묘함을 해치는 ‘위험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설처럼, 그저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어설픈 규정으로 사물의 본질을 해치고, 왜곡하는 ‘위험한’ 짓을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꽃’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상징입니다.

2연

그래서 꽃은, 자신의 오묘한 본질을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규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다가(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 보지도 못한 채(이름도 없이) 왔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한편, 나는 꽃의 본질을 제대로 밝힐 수 없는 답답함에(무명의 어둠에) 눈물을 흘리면서, 비록 보잘것이 없는 능력이지만 내 지식과 경험의 모든 것(추억의 한 접시 불)을 동원해 봅니다.

3연

나의 이 노력이 마침내 꽃의 본질을 밝힐 수만 있다면, 중심에 도달하려고 애쓰며 돌탑을 흔들다가 결국 중심에 스며드는 돌개바람처럼, 그 결실은 금처럼 귀한 성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연

하지만 꽃의 오묘한 본질은, 마치 얼굴을 가리운 채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신부처럼, 아직 나를 안타깝게 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내 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이고,그 일과 행동이 왜 그렇게 되는가를 파악해 가는 과정입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혹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모두 왜곡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곧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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