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 다시 읽기>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렇게 '민중은 개 돼지'가 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져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사랑 노래를 즐겼다’(제1연)는 것은 겉으로 외치는 허장성세(虛張聲勢)보다는 은밀하고 실질적인 투쟁의 방법을 슬기롭게 추구했다는 고백이다. ··· 그러나 항거는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나 처절하다. 그러기에 최영미는 그 뼈아픔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그 모든 걸 잘 기억해내며/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것/······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제2연)고 진솔하게 실토하고야 만다. 그러면서 끝내 결연한 의지를 굳힌다.
- 홍윤기, ‘한국 현대시 해설’
정의와 민주를 향한 불굴의 의지와 투쟁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집요함과 그 여파로 자살이라는 길을 선택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의 상당 부분은 허망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이 시가 1994년 세상에 던진 충격도 그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군부독재를 지탱했던 세력을 포함한 3당 야합으로 이루어진 결과여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진정한 민주화를 향해 가야 할 길이 꽤 길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반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의 본체로 여겨졌던 한 시인이, ‘나는 이제 그 일을 떠나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1연
민주화 운동권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같은 유형은 아닐 것입니다. 이론으로 무장하고 투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가진 지도부도 있을 테고, 그들의 투쟁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군부독재에 반대하지만 용기를 낼 수 없어서 시위가 있을 때면 그때그때 자신의 안위를 살펴가며 참가하는, 6월 항쟁의 넥타이 부대 같은 소시민도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그 중 자신이 두 번째나 세 번째 유형 사이의 어디쯤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물론 나는 알고 있다).
자기는 민주화 운동 자체에 대한 신념과 의지보다는(운동보다, 술보다) 민주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그 분위기(운동가, 분위기)의 매력에 빠졌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그들 중에 화자가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화자는 또 자신이,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욕구를 함께 가진(외로울 땐, 사랑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음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돌연,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말해 버립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떠나 다시 관심을 두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이 ‘관심 끊기’의 이유가 궁금합니다. 문민 정부의 등장으로 반민주 투쟁의 목표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니 떠나겠다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에서 ‘서른’이 강조되고 2연에서 ‘지갑’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관심 끊기의 이유는 명확해 보입니다. ‘이제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2연
술자리가 잔치고, 술자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방향과 성과를 논의하는 자리일 테니, 술자리와 잔치는 곧 투쟁 그 자체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제 화자처럼 서른 살이 넘어 현실적 삶의 문제(지갑)를 고민해야 할 사람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투쟁의 길에서 멀어집니다(떠납니다). 화자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마저도(마침내 그도).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남아 떠난 사람들이 남겨 놓은 일들을 마무리지으면서(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지난 날을 회상하며 눈물지을 것이고, 첫 번째 부류가 해 왔던 투쟁(그가 부르던 노래)의 길을 수정해 나갈 것(고쳐 부르리란 걸)입니다.
또 투쟁의 세대는 단절되지 않을 것을 화자는 짐작합니다. 다시 새 세대가 등장하여 이 운동을 계승하고(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민주와 정의의 세상(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다시 사람들을 모아 그 투쟁을 계속해 나가리라(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생각합니다.
3연
그러나 화자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상관하지 않기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세대가 그 힘든 투쟁을 이어나갈 것을 알지만, 이제 먹고 살아햐 하는 화자의 현실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없습니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에서 느껴지는 체념과 탄식의 어조가 처연할 따름입니다.
내가 느꼈던 허망함을 같이 느낀 듯한 수많은 해설가들도, 그 충격을 견딜 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위에 소개한 다른 분의 해설처럼,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애써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구는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해설자들이 애써 감싸줄 일도 아닙니다. 이 시가 애처러울지언정 무서우리만큼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너무나 솔직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큰 울림을 준 시가 된 까닭입니다.
사회는 흘러가서 정의와 민주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결정적인 때가 오면 소시민들이 다시 잔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더라도, 한 개인이 늘 개별적으로 느끼는 먹고 사는 일의 절박함은 또 그것대로 엄연한 현실입니다.
7,8년 전쯤인가 ‘99%의 민중은 개, 돼지’라고 했던 어느 고위공직자는, 그 말을 이런 맥락에서만 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