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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May 30.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정지용, '장수산I'

의고체(擬古體)의 현대시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정지용의 시에서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균제미(均齊美)는 시집<백록담>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이른다.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장수산’이나 ‘백록담’과 같은 작품에서는 시적 심상 자체가 일체의 동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그리고 명징한 언어적 심상으로 하나의 고요한 새로운 시공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이러한 시적 방법에서 우리는 정지용이 체득하고 있는 은일(隱逸)의 정신을 보게 된다. 자연의 역동성을 거부하고 있는 정지용의 태도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세계 인식이라고 폄하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 시가 도달하고 있는 정신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


  깊은 산중 겨울 달밤의 정밀(靜謐, 고요하고 편안함)을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자연을 하나의 정신적 공간으로 형상화한 멋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고어체의 어투와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데다가,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행을 문장 단위로 끊고 있지 않아 호흡이 길어져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지만, 먼저 문장 단위로 풀어 보는 일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쩌렁쩌렁한 소리를 내며 나무가 베어진다는 말이 있더니, (이 장수산은) 아람드리 큰 소나무가 (그런 소리를 내며) 베어질만도 하구나(큰 나무들이 울창하구나). (또 그 소리가) 골짜기를 울리며 쩌르렁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만도 하구나(산이 깊고 웅장하구나). 다람쥐도 좇지 않고 산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게 하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도 희구나. 달도 오늘 보름을 맞아(기다려) (이렇게) 흰 까닭은 한밤 이 (고요한) 산골을 지나기(걸음) 위한 것이 아닐까?


  고요한 산의 울창하고 장엄한 모습을,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오히려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는 역설적 표현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뒷부분에서는 산의 신비스러운 정밀감(靜謐感)이 시각적으로 그려집니다. 금방이라도 쩌렁쩌렁하게 나무 쓰러지는 소리와 그 메아리가 터져 나올 듯한 긴박감을 감춘 채,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깊은 산의 적막이 화자를 에워싸고 있건만, 한밤의 산속 정경은 오히려 쌓인 눈과 마침 그 위에 내리는 보름달의 밝은 빛으로 온통 희기가 백지보다도 더합니다.

# ‘벌목정정’은 커다란 나무를 벨 때 울리는 쩌렁쩌렁한 소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나무를 베는 소리가 아니라, 벨 때 그런 소리를 낼 만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창한 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윗절의 중이 (바둑을)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절로 돌아간 뒤, 맑고 깨끗하게 늙은 사나이(윗절의 중)의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본다(내음새를 줏는다, 냄새를 줍는다), 그러나 내(화자의)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한 산속에서도) 속에서도 심히 흔들리니. 오오. 견디련다, 차갑고 의연하게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이 작픔은 전형적인 한시의 선경후정(先景後情), 앞에서 경치를 묘사한 다음 뒷부분에서 화자의 내면을 표현하는 구성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정입니다.

  산속은 고요하고 윗절 중은 초탈하지만, 화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가득한 시름으로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여섯 판을 내리 지고도 여유 있게 웃고 돌아간 늙은 중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생각하는데, 이를 ‘내음새를 줏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수산의 이미지대로 자족과 여유, 무욕 가운데 늙은 중의 모습입니다. 이를 생각하며 화자는 자신의 시름을 차갑고 의연하게 견디겠답니다. 슬픔도 꿈도 모두 이 장수산 속의 겨울 한밤의 적막 속에 묻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울 정도로 고요하고, 흰 눈과 달빛만이 가득한 장수산 골짜기의 숲속은 허적(虛寂)하지만 정밀(情密)의 공간이고, 온갖 세속적 욕망과 고뇌를 떨쳐 낸 도승의 이미지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온갖 세상사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장수산의 절대를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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