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은자[大隱. 대은]는 시장에 은거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시에서 ‘섬’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로서의 ‘섬’이다. 이때의 섬은 현대인의 단절된 인간관계의 복원을 염원하는 상징적 기호이기도 하다. ‘그 섬’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관계의 회복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다락방’ 같은 고독한 공간으로서의 ‘섬’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부대끼다보면 인간에 대한 염증이 짙어져서 무인도 같은 ‘섬’을 꿈꾸게 된다. 이런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섬이고, 그 섬은 외로움을 달래고 싶거나 고독해지고 싶어서 찾는 이율배반적인 공간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치유 받는 존재다. 상처받지 않으면 치유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자극과 반응이 사라진 진공상태 같은 공간을 우리는 더 견딜 수가 없다. 현실 바깥에 ‘섬’이 없다면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 김남호, '그 섬에 가고 싶다' -
워낙 짧은 작품이라, 시 안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독자는 그 빈칸을 자기 경험으로 메우게 되고, 그만큼 이 시를 자기 이야기처럼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이상하게도 한 옛말이 떠올랐습니다.
‘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소은은능수, 대은은조시)’
작게 은거하는 사람은 산과 숲에 은거하고, 크게 은거하는 사람은 조정과 저자, 곧 세상 한가운데서 은거한다는 말입니다. 은거는 단순히 몸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와 권력, 이익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자기 길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시장’은 실제로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고 비교하고 이용하는 우리 사회 전체를 비유하는 말로 읽고 싶습니다. 회사, 학교, SNS, 인간관계까지, 사람과 사람이 얽혀서 끊임없이 거래와 경쟁이 벌어지는 그 마당 전체가 ‘시장’입니다.
진정한 은자는 그런 시장 한가운데서도 세상사, 권력, 이익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의 결을 지킨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화자가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의 섬’을, 그런 의미에서 시장과 같은 사회 속에서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은둔의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몸을 숨기는 은둔이 아니라, 군중 속에 섞여 살아도 이익과 권력에 마음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은둔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섬
섬은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크지 않고, 쉽게 건너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섬은 자연스럽게 경계와 거리, 그리고 여백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떠오릅니다. 시 속에서 화자는 이 섬을 사람들 사이에 놓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가 생기고, 거리가 생기고, 말과 말 사이에 작은 여백이 생깁니다.
비유로서의 ‘시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 자체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능력·스펙·성공 가능성 같은 것으로 재단하기 쉽습니다. 누구는 경쟁자, 누구는 발판, 누구는 자원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장 같은 관계들 사이에 놓인 섬은, 사람을 값이나 역할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경계와 거리입니다.
그 섬에 선 사람은, 시장 속에 똑같이 서 있으면서도 시선을 조금 다르게 돌립니다. 이익을 계산하기 전에 잠깐 멈추어 보고, 반응을 쏟아내기 전에 한 번 더 들여다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의 섬’은 관계를 끊어 버리는 고립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도 자기와 타인을 거래의 언어로만 보지 않게 만드는 마음의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 ‘있다’라는 단어입니다. 화자는 '섬이 있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섬이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한 단어 안에 몇 겹의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이미 우리의 삶 속 어딘가에 그런 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늘 시장 같은 세상에 내던져져 사는 것 같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마음이 반 걸음 물러나는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삼켜 보고, 감정을 바로 내지르지 않고, 한 번 더 숨을 고르는 그 순간들이 곧 섬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둘째, 그런 섬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지치고 부서진다는 점에서, 섬은 우리가 반드시 마련해야 할 최소한의 보호막이기도 합니다. 비교와 경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아무 경계도 없이 나를 내맡기면 상처를 주기도 쉽고, 상처를 받기도 쉬워집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라는 말에 겹쳐져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셋째, 이 '있다'는 말은 도망치지 않은 채, 이 자리에서 섬을 만들어 가겠다는 선택으로도 읽힙니다. 산으로 떠나거나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바로 이 시장 같은 현실 한가운데서 나만의 작은 섬을 세우겠다는 조용한 다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선언은, 어쩌면 '나는 그 섬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자기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가고 싶다
두 번째 줄의 '그곳에 가고 싶다'는 문장은, 이 시 전체를 이끄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화자는 단순히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곳으로 직접 가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간다’는 것은 물리적인 이동이라기보다, 태도의 변화에 가깝습니다. 문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부수겠다는 공격도 아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 버리겠다는 회피도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 시장 같은 관계의 한가운데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반응의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고, 자기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쪽으로 한 걸음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 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떨어져 혼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서도 덜 상처 받고, 덜 상처 주며,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가는 방식도, 스스로를 끝없이 깎아내리는 방식도 아닌, 자기 안의 섬에서 잠시 발을 디디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걸어 나가려는 소망, 이것이 바로 시장 같은 세상 속에서 은둔을 선택하는 한 방식일 것입니다.
두 줄 형식
이 시가 단 두 줄로 서 있다는 형식 역시, 시인이 말하고 싶은 섬의 성격을 조용히 드러내 줍니다. 말 한 줄, 말 한 줄 사이에 넓게 펼쳐진 여백은 마치 시가 스스로 하나의 섬이 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독자는 이 두 줄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페이지 위의 빈 공간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그 빈자리에서 우리는 잠깐 말을 멈추게 됩니다.
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짧은 문장은, 의미를 길게 설명하기보다 느낌과 리듬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는 대신, 단어들의 간격과 소리, 그리고 줄과 줄 사이의 침묵이 우리 안에 작은 멈춤을 만들어 냅니다. 시의 모양 자체가 시장의 속도를 늦추는 장치처럼 작동하는 셈입니다. '사람, 사이, 섬, 싶다'로 이어지는 ‘ㅅ’ 소리도 소란을 조금 식히는 차가운 리듬이 됩니다.
시장 같은 세상에서 은거한다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한가운데서 반 박자 쉬고, 반 보 뒤로 물러서고, 다른 리듬으로 서 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이 시는, 그런 섬이 이미 우리 삶 어딘가에 있고, 우리는 언제든 잠시 그 섬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신호처럼 들립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시장 같은 사회 속에서, 이익과 권력의 유혹에서 경계와 거리, 보호된 고독, 숨 고르기의 섬을 잃지 말자는 말로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