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의 기가막힌 시적 변용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화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남해 금산에 서 있습니다. 눈앞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이 펼쳐져 있고, 화자의 마음은 과거의 사랑 속으로 깊이 돌아가 있습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한 여자가 돌 속에 묻혀 있습니다. '돌 속'은 단순히 어떤 장소가 아니라, 바깥과 단절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대로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아무나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녀는 제약이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또는 화자가 마음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심리적 요인인지 사회적 요인인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돌 속에 따라 들어갑니다. 단단하고 밀폐된 속에 스스로 들어갔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사랑의 조건과 상황 속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인 줄 알면서도, 사랑 때문에 그 선을 넘었다는 말입니다.
사랑 때문에 금기를 깨고, 기꺼이 어둡고 막힌 곳을 선택한 화자의 무모함과 헌신, 슬픈 예감이 듭니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이렇게 무리하게 버텨 온 사랑의 관계이니 결국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라는 말은, 충격적인 이별의 분위기를 한 번에 보여 줍니다.
그날, 그녀는 그 관계를 끊어 버리고 떠나 버립니다. 화자의 뜨거운 사랑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도 쉬운 이별은 아니었나 봅니다(울면서).
화자는 떠나가는 그녀를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와 달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운명, 더 큰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 사랑은 처음부터 그 질서에 어긋나 있었고, 결국 운명이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자에게서 데려가 버린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돌 속까지 따라 들어간 화자는, 이제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자기보다 훨씬 큰 힘이 그녀를 데려갔으니, 그 순간의 상실감과 버려진 느낌이 더욱 애절할 것입니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제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옵니다. 화자는 남해 금산에 홀로 서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철저한 고독이 맞부딪치면서, 화자의 슬픔은 더 깊어집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그녀를 따라 돌 속으로 들어갔건만 해와 달에 의해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철저한 수동성, 그 무력감! 화자의 몸은 산 위에 서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아픈 기억과 상실 속에 스스로 잠겨 들어가는 애절한 마음을 보여 줍니다.
***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은 남해 금산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하인 총각이 주인집 아가씨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상사병으로 죽었는데 뱀이 되었다.
그 뱀이 아가씨 몸을 칭칭 감고 떨어지지 않아서
아가씨는 시집도 못 가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남해 금산 상사바위에서 굿을 하자,
뱀이 떨어져 나와 상사바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는데,
그때 독수리가 날아와 뱀을 물고 가서
아가씨는 살게 되었다.
이 전설에서는 집착하는 남자 귀신에게서 벗어나는 아가씨가 중심입니다. 사랑이 너무 집요해져서, 상대에게 공포와 괴로움을 주는 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전설을 가져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 놓습니다. 뱀으로 변한 남자의 징그럽고 집착적인 모습은 전혀 시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돌 속까지 들어갈 만큼 사랑했지만, 끝내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하늘과 바다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전설 속에서는 '물리쳐야 할 할 집착'이 중심이라면, 이 시에서는 '상실 당한 사랑을 품고 남겨진 한 남자의 애절한 마음'이 중심입니다. 그렇게 이 시는, 무섭고 기괴하게 들릴 수 있는 귀신 이야기를,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시인의 시적 변용이 아주 인상적이고 놀라운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