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일 뿐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겨울밤 작은 시골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러한 평범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단함과 그 속의 작은 따뜻함을 보여줍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고, 대합실 밖에는 눈이 쌓이며, 지치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졸고 기침하며 말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톱밥을 난로에 던져 온기를 살리고, 마지막에는 한 줌의 자기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넣습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대합실의 풍경
눈, 유리창, 난로가 함께 차갑지만 또 따뜻한 겨울 대합실의 풍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수수꽃처럼 눈보라가 얼어붙어 유리창에 생긴 서리에 눈이 시린데, 그 유리창마다에 톱밥난로가 비칩니다.
오지 않는 막차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막막한 기다림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도 그런 춥고 외로운 밤 속에도, 톱밥난로처럼 소박한 따뜻함은 늘 어디엔가 남아 있습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고단한 삶의 모습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믐달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졸고 기침하는 모습들입니다. 화자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옛 귀향길,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화자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어쩌면 옛날의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소박한 온기를 키웁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고단한 삶에 대한 공감과 침묵
사람들은 모두 고단한 사연들을 안고 있지만, 얼어붙은(청색) 손바닥만 난로에 쬐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말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힘들게 일하다가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소박하고 현실적인 선물(굴비, 사과)을 만지작거리며 설레는 사람들처럼, 술에 취한 듯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잠시 잊고 그냥 묵묵히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눈꽃의 위로
오래된 병(기침소리), 고단한 현실과 피곤한 삶(입술담배)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위로와 같은 정적과 아름다움이 스며들고 있습니다(싸륵싸륵 눈꽃). 힘든 삶 속에서도 아주 잠깐씩 찾아오는 평온과 아름다움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위로를 받습니다(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섦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슬픔의 정화
자정이 지나면 하루가 가 버리고 눈이 쌓이면 낯설고 아픈 이 세상이 덮여 버릴 것(설원)입니다. 그처럼 지난 우리의 외로움, 괴로움도 하얀 설원 속으로 묻혀 버립니다. 이제 계절의 끝에서 삶의 끝자락을 향해 달리는 인생(밤열차)의 앞길에는 또 어떤 아름답지만 쓸쓸한(단풍잎 같은) 풍경이 펼쳐질까요?
화자에게도 잃고 싶지 않았던 과거(그리웠던 순간)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며(호명하며) 화자는 이제 마음 깊이 묻었던 슬픔(한 줌의 눈물)을 불빛 앞에 고백하고, 태워 보내려고(불빛 속에 던져) 합니다.
이 작품은 한겨울 작은 역 대합실이라는 좁은 공간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법한 인생의 밤을 담담하게 그려 낸 시입니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지친 모습,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담배 연기, 싸륵싸륵 쌓이는 눈꽃과 설원, 단풍잎 같은 차창과 한 줌의 눈물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섬세한 이미지로 고단한 현실과 조용한 위로의 순간을 함께 보여줍니다.
특히 한 줌의 톱밥이 한 줌의 눈물로 이어지는 장면은 남을 위해 불을 지피는 소박한 행동이, 자기 슬픔을 고백하고 정화하려는 내면의 움직임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삶의 버거움과 침묵, 그리고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따뜻함을 절제된 언어에 담아, 매일을 살아 내는 우리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