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나 여자적(女子的)인, 그래서 비존재적(非存在的)인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풀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이 작품을 읽으면 한 여자가 떠오릅니다. 외모가 세련된 커리어우먼도, 사회성 좋은 직장인도, 사고가 깊고 성격까지 완벽한 여성도 아닙니다. 그저 심수봉의 노래 속 화자처럼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말할 것 같은 여자, 혹은 고 김자옥 배우가 보여주었던 여리고 소녀 같은 캐릭터의 여자입니다.
'가장 여자다운 여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감싸 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자. 작고 여리지만, 한편으로는 맑은 영혼과 순결, 자유를 지닌 여자. 화자는 그런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화자의 이상적 여성상일뿐 아니라, 화자가 마음속에서 늘 추구하는 '이상적인 시(詩)'의 모습과도 겹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적인 여성, 그리고 이상적인 시. 이 두 가지 층위로 이 시를 감상해 보려 합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풀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룰 사랑했네.
1연: 작고 여린 여자, 그리고 섬세한 시의 세계
1연에서는 여자의 모습이 비유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화자가 사랑한 여자는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입니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고 기댈 곳 없는 약하고 고립된 존재처럼 보입니다. 거친 삶을 온전히 견뎌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솜털', '맑음', '영혼', '눈'을 가졌습니다. 작게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섬세한 감정, 깨끗한 마음, 자기만의 인격과 시선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약해 보이지만, 쉽게 드러내지 않을 뿐(보일 듯 보일 듯) 분명한 순결과 자유를 품고 있습니다.
한편, 화자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섬세한 감정과 순간을 포착하는 '짧은 시 한 편(쬐그만 한 잎)'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는 예민한 감수성, 투명한 언어, 깊이, 독창적인 시선(솜털, 맑음, 영혼, 눈)이 담겨 있습니다. 몽롱해 보이는 언어 속에 자유롭고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가 숨 쉬고 있는 것이지요.
1연은 이렇게 작은 여자와 작은 시를 겹쳐서 보여줍니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2연: 순수 그 자체로서의 여자, 목적 없는 시의 운명
2연에서 그 여자는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지식, 능력, 이념, 지위, 욕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여자'라는 순수한 역할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온갖 괴롭고 힘든 일(눈물), 아프고 서러운 일(슬픔)은 다 떠맡는 어리숙한 사람, 소위 '병신 같은' 사람입니다. 그녀가 안고 있는 것이라고는 해맑은 순수와 사람들의 고통뿐입니다(시집 같은 여자).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부적응자일지 모르지만, 화자에게는 사랑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지나치게 이상적인 여자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이며, 누구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순수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행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진짜 불행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원히 가질 수 없어서 불행한 여자'라는 말은, 그녀를 가질 수 없는 화자의 결핍과 슬픔이 투영된 화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그저 한 잎의 잎사귀처럼 맑게 존재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화자가 추구하는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구호나 실리적 목적이 섞이지 않은 '오직 시 그 자체(여자만을 가진 여자)'입니다. 효율을 말하는 사회에서 시는 '병신'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화자는 바로 그런 글(시집 같은 여자)을 사랑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그 절대적 순수의 경지에 영원히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시를 '불행한 여자'로 명명하며 자신의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3연: 가질 수 없기에 영원히 추구하는 사랑
그 여자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라서 현실에서는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지만(영원히 가질 수 없는), 그렇기에 오히려 마음속에서는 평생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존재가 됩니다. 객관적인 시간 속에는 없더라도 화자의 기억과 정서 안에서 그녀는 영원할 것입니다. 현실 곁에는 없지만 내 영혼에 그림자처럼 붙어살아야 하는, 그래서 더 슬픈 존재입니다.
화자가 바라는 시 역시 완전하게 이룰 수 없는 무엇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평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시는 누구의 것으로도 완전히 소유될 수 없는 대신, 시인에게는 평생 걸어가야 할 고독하고 슬픈 길(슬픈 여자)로 남게 됩니다. 그 길을 화자와 시는 그림자처럼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여자적(女子的)인, 그래서 비존재적(非存在的)인
이 시는 한 유형의 여성상과 순수시의 운명을 동시에 비춰 주는 작품입니다. '물푸레나무 한 잎, 솜털, 맑음' 같은 이미지를 통해 연약한 여자를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쓸모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슬픔을 가장 깊이 떠맡고 있는 순수시(詩)를 그려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여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녀는 너무나 '여자적(女子的)'이기에,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비존재적(非存在的)'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여자' 혹은 '순수시'는 현실 세계에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만 존재하며, 화자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그 그림자를 쫓으며 사랑하고 슬퍼합니다.
우리가 끝내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평생 추구하게 되는 어떤 이상(Ideal). 이 시는 그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서글픈 고백입니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은 '소망'의 상징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도 '한 잎의 여자'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시적 대상인데 꼭 '문학'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