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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사슴' 해설과 감상

- 고결에 드리운 그림자, 고독과 비애

by 느티나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픔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특정한 사물·상황·장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을 흔히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사슴’은 바로 시인 자신의 내면과 고독을 투영한, 매우 정교한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상(理想)의 세계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벽에 갇혀 있는 자신의 소외와 단절감을 ‘사슴의 긴 모가지’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픔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사슴의 운명적 비극과 절제의 미학

화자는 사슴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긴 모가지’는 하늘과 먼 곳을 향한 높은 이상을 상징하지만, 사슴의 발은 여전히 땅에 묶여 있어 그 이상에 닿을 수 없습니다. 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이 바로 사슴의, 그리고 화자의 슬픔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사슴은 소란스럽게 울부짖지 않습니다.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슴은 고통을 밖으로 분출하기보다 안으로 삭이는 절제, 고요한 품위를 보여 줍니다. 이 조용한 태도가 오히려 비극성을 더 깊게 느끼게 합니다.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정신적 귀족주의

여기서 ‘향기’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고결함과 순수함을 상징하고, ‘관(冠, 뿔)’은 사슴의 품격과 위엄을 함축합니다. 화자는 사슴이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말하며, 사슴을 속된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고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곧 화자가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단순한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혼탁한 현실로부터 일정하게 떨어져 있는 ‘정신적 귀족’의 고독으로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자기 응시와 상실의 확인

사슴은 물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현재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잃었던 전설'을 떠올립니다. 이는 고독한 사슴이 외부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침잠하여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를 통해 고립감을 견디려는 일종의 '자기 응시(나르시시즘. 자기 몰두)'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설’은 사슴이 본래 속해 있었던 이상향, 잃어버린 고향, 원래의 세계를 가리키며, ‘잃었던’이라는 수식어는 그 세계가 이미 상실되어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사슴은, 그리고 화자는 되찾을 수 없는 과거와 이상을 떠올리며 자신의 상실을 더욱 또렷이 깨닫게 됩니다.



어찌 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근원적 향수와 존재의 고독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슴은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향수’는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 존재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을 뜻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그 그리움이 아무리 애써도 풀 수 없고, 현실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감정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슴은 슬픈 목을 들어 도달할 수 없는 '먼데 산'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이 '먼데 산'은 사슴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 혹은 잃어버린 고향의 상징입니다. 이는 이상을 향한 간절한 동경인 동시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영원히 방황할 수밖에 없는 화자,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 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가치는 절제된 언어와 선명한 이미지만으로 내면의 고독을 한 폭의 그림처럼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슴의 정적인 모습을 포착하여, 그 안에서 ‘고결한 비애(悲哀)’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매우 놀랍습니다.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감정의 간접적인 전달, '향기로운 관'과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의 활용,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 구조는 시인의 뛰어난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격정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순수한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한 이 작품은, 한국 서정시의 귀중한 성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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