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의 계엄령', 현실로써 오히려 자연을 은유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이 시의 화자는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폭설이 쏟아지는 고립된 공간에 놓여 있습니다. 눈앞의 풍경은 아름다운 설경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재난의 현장입니다. 화자에게 지금 이 압도적인 자연현상은, 모든 생명력을 말살하려는 ‘군단’이자 ‘계엄령’과 같은 폭력적인 존재입니다.
화자의 시선은 세상을 뒤덮는 거대한 ‘백색(눈보라)’과 그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는 작고 초라한 ‘흑색(숯덩이 같은 굴뚝새)’사이를 오갑니다.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떨고 있는 연약한 생명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1연 : 단절된 세계와 생존의 위협
눈으로 뒤덮인 깊은(해일처럼 굽이치는) 산중입니다. 문명의 보호나 구조를 기대할 수 없는 철저히 고립된(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장소입니다. 지금은 이 깊은 산 골짜기를 다 메울 듯이 굵은 눈발이 휘몰아칩니다.
그 거대한 배경 속에 위태롭게 날아가는 생명체가 하나 클로즈업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쬐그마한 숯덩이) 굴뚝새가 연약한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가는데, 이 엄청난 사태 앞에서 생존이 걱정됩니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2연: 적의가 느껴지는 백색의 습격
화자는 '눈보라(군단/계엄령)'라는 거대한 배경을 묘사합니다. 굴뚝새를 위협하는 힘의 실체를 웅장하고 공포스럽게 그려냅니다.
외딴 마을은 이제 고립될 듯합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등산객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눈은 낭만의 눈이 아니라 화자를 향해 덤벼드는 공격체입니다. 지금까지 신비롭게 여겨 오던 은하수가 적으로 돌변하여 공격을 하는 듯합니다.
이 엄청난 물리적 압박감과 공포를 화자는 조직화된 무력(군단)의 공격으로 비유합니다. 그 군대가 모든 자유와 일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계엄 사태라고 말합니다.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3연: 포식자의 존재와 숨 막히는 공포
화자의 눈은 다시 굴뚝새로 향합니다. 보잘것없이 연약한 몸뚱이(쬐그마한 숯덩이. 짧은 나래)가 다시 강조되고 피폐해진 모습으로 오두막 뒷간에 부랴부랴 몸을 숨기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 눈보라를 뚫고 날아온 굴뚝새는 가장 낮고 은밀한 ‘뒷간’으로 몸을 숨깁니다. 화자는 굴뚝새가 이토록 서둘러 숨는 것이 ‘솔개’ 때문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 극한의 위기 상황 속에서 하늘 어딘가에 자신을 노리는 포식자(솔개)까지 있는지, 굴뚝새는 공포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 추위보다 더 무서운 심리적 공포가 지배하는 상황입니다.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4연: 전방위로 확산되는 고통과 위기
다시 '눈보라'가 지배하는 세상 전체로 시선이 확장됩니다. 굴뚝새뿐만 아니라 산짐승, 나무, 인간(외딴집)까지 고통받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엄청난 폭설이 공격을 가하는 대규모의 군대처럼 몰아치고, 쌓인 눈의 무게는 소나무 가지들을 부러뜨릴 듯한데, 이런 사태는 짐승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듯합니다. 이 폭설이 가하는 압력이 어떤 특정 대상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때죽나무'가 '떼죽음'을 연상시키고, 생존의 몸부림을 암시하는 '때(끼니) 끓이는'에서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죽음의 공포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숨 막히는 압박과 긴장의 '백색의 계엄령'은 해제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을 통해 생명이 느끼는 극한의 공포와 긴장감을 그려낸 시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백색의 이미지'가 뒤집혀 있습니다. 순수와 평화를 상징하던 흰색을 죽음, 공포, 억압의 색채로 바꿈으로써 독자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굴뚝새(점) ↔ 눈보라(면)'의 시각적 대비를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며 전개됩니다. 1연에서 날아오른 새가 2연의 폭력을 뚫고 3연에서 숨어버리자, 4연에서 그 폭력이 온 세상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는 치밀한 구성을 통해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눈보라(백색/군단)’와 ‘굴뚝새(흑색/개인)’의 선명한 시각적 대비는, 압도적인 외부의 힘과 그 앞에서 위태롭게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의 비극성을 탁월하게 형상화했습니다.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빼고 보더라도, 이 시는 불가항력적인 폭력 앞에 놓인 나약한 존재들의 불안과 공포를 감각적으로 그려내어 보편적인 폭력의 비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단', '계엄령'이라는 시어를 보면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슬쩍 그 말들을 비유의 자리(보조관념)에 내려놓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눈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신호입니다. 성공한 내란 시대였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눈보라를 묘사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 비유어들이 시 전체를 장악하게 만드는 주객전도의 묘미, 그것이 이 시의 백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