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용래 '저녁 눈' 감상과 해설

- 쓸쓸함이 붐비는 변두리 풍경

by 느티나무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이 시의 핵심은 겨울 저녁 변두리의 쓸쓸한 정경 위에 ‘붐비다’라는 동사를 얹어 놓은 역설에 있습니다.

많은 해설이 이 시를 농촌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거나 암시하는 작품으로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시가 어떤 장소의 한 시점을 스쳐 지나가는 쓸쓸함을 포착한 정경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네 행 모두가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 붐비다'라는 같은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 시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변두리의 저녁이 한층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표현한 듯합니다.

구체적 장면들은 집(1연)·말(2연)·일(3연)이라는 생활의 요소들입니다. 이 요소들은 마지막 4연에서 ‘변두리 빈터’라는 한 단어로 모여, 삶의 자취가 희미해진 공허함으로 압축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 시는 '비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고독으로 가득 찬' 독특한 서정을 완성하게 됩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말집’은 ‘말을 키우는 공간’, 즉 마구간이라기보다 ‘말을 키우고 있는 집’에 가깝게 보입니다. 다음 연에 '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연은 '집'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호롱불'은 희미하고 온기가 적은 변두리 작은 집의 약한 등불일 터입니다. 화자는 여기에 눈발이 '붐빈다'라고 표현합니다. 기척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 대신 자연(눈)이 집 주변을 가득 채우는 역설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 공간을 쓸쓸함이 가득 채우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화자는 시선을 '조랑말 발굽 밑에' 곧 집 밖, 길 위로 옮깁니다. 원래는 사람들의 바쁜 발길로 붐볐어야 할 길이지만, 지금 그 길에는 작은 조랑말과 그 주변을 몰려다니는 눈발뿐입니다. 여기서도 '붐비다'는 물리적인 혼잡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인간의 활력이 빠져나간 공허한 자리를 눈의 움직임이 대체하고 있는 변두리의 정경을 표현합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누군가가 '여물(소의 먹이)을 썰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기척이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반복적으로 들립니다. 화자는 이 소리를 중심으로 눈발이 붐빈다고 표현합니다. 눈발이 사람의 미약한 기척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변두리의 저녁 시간이 점점 쓸쓸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1~3연은 이처럼 집·말·일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사람의 자취가 희미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변두리'는 앞 연들에서 제시된 집·말·일의 자리를 모두 포괄하는 바깥의 공간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리의 밖이고, 마을 중심에서 한 겹 밀려난 가장자리이며, 화자가 서 있는 고독한 자리입니다. '빈터'는 그러한 삶의 자리를 바라보는 화자의 정서적 결론일 것입니다. 그 위를 '눈발이 다니며 붐비다'라고 한 것은, 더 이상 사람의 온기로 붐비지 않는 변두리 전체를 눈과 고독이 대신 채우고 있다는 역설을 통해, 1~3연의 구체적인 쓸쓸함을 한 번에 종합, 압축시켜 줍니다.



이 작품은 겨울 변두리의 작은 풍경을 빌려 사람의 자취가 미약해지고 그 공백을 자연이 채우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화자는 집·말·일이라는 구체적인 생활의 쓸쓸한 모습을 '변두리 빈터'라는 말로 묶어 내면서, 그 자리의 총체적 공허를 보여줍니다. 이때 눈발이 '붐비다'라는 역설적 표현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비어 있는 공간을 눈과 고독의 무게로 가득 채워 넣는 고도의 시적 장치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애잔하고 향토적인 서정을 완성시키는 이 작품의 힘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보통 이 시를 해설할 때 주목하는 것은 '눈 내리는 농촌의 고단한 삶'입니다. 춥고 어두운 저녁,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민중의 팍팍한 현실을 함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현실의 고발보다는 '풍경의 서정'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기존의 해석이 '눈이 붐비는 상황'을 삶의 무게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이를 '사람이 사라진 공백을 확인하는 장치'로 해석했습니다. '붐비다'라는 활기찬 단어를 사용하여 오히려 인기척 없는 적막을 강조하는 이 역설이야말로, 이 시가 단순한 현실 묘사를 넘어 고독의 정점을 찍게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삶의 비애를 이야기하기보다, 변두리라는 공간이 품은 근원적인 쓸쓸함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낸 '정경시(情景詩)'로 읽을 때 그 맛이 더 깊어지는 듯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최승호 '대설주의보' 해설과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