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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수 Jan 26. 2024

고등학생인데, 한 잔 하라고요?

청년·성인·노인·정년(停年)-인생을 분절(分節)하기

  이제 공장을 비롯한 산업시설들이 제법 들어선 서울 근교라고는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땅은 논과 밭이었고, 마을 주민들도 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 농사는 아버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물꼬를 보러 다니는 일이나, 모내기, 김매기, 추수 때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의 일에는 나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모님과 농사를 짓고 있던 국민학교 동창들도 우리집 일에 오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나는 아침 일찍, 저녁 늦게 버스나 기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등하교를 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자주 또는 길게 만나기가 어렵던 친구들이었습니다.


  큰 농사일이 있을 때는, 집에서 점심과 새참을 만들어 들로 내옵니다. 막걸리도 있습니다. 모여 앉아 밥을 먹는데, 동네 아저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내 동창들뿐 아니라 나에게까지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자, 한 잔 받아라.”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 동창들이 한쪽 구석에서 담배까지 피우고 있건만, 아저씨들에 게는 영 대수롭지가 않은가 봅니다.

  ‘이 아저씨들이 학교를 안 다녀 봐서, 애들이 술 담배하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시나?’

하면서도, 나도 제법 어른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더 점잖게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그 일을 돌이켜 보고는 하다가 얼마쯤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아저씨들이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기준은, 정해진 나이나 학교의 급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말투나 행동이 제법 의젓해지고 키나 몸무게가 어른의 정도에 도달해서, 논밭에서 또 공장에서 한 사람의 일꾼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가 어른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족과 집안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일해서 밥벌이를 해 나갈 수 있는데, 어른이 아닐 이유가 없습니다. 술 담배뿐만 아니라 연애를 해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고, 아마 그 나이에 장가를 든다고 해도 별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심심치 않게 술, 담배, 연애가 문제가 되었고, 교칙위반, 비행, 일탈 행동의 문제아가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동네에서는 그런 일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거의 어른이 된 아이가 그냥 어른짓을 시작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성장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성장과 시간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분절(分節)을 한다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디지털화된 시계가 어느 순간 ‘째깍’하면서 19살 또는 대학생이 되었다고 알려주면, 그때부터는 그 이전에 일탈이었던 모든 행동들이 갑자기 정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혹시, 이렇게 인간의 시간을 분절해 버리는 사회 제도가, 역으로 청소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계가 ‘째깍’하지 않았으니 나는 어른이 아니다. 그러니 벌써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과 행동의 준비, 훈련, 실습, 시행착오의의 점진적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째깍’하는 순간 어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농경사회와 달리,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30, 40의 미성숙한 어른들이 넘쳐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년의 법적 규정은 긴 시간의 논의를 거친 사회적 합의이니, 여기에 시비를 걸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술과 담배를 권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성인, 청년, 장년, 노년에서 정년(停年)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흐름을 분절해서 다루어 버리는 제도가, 그리 자연스러운 일 같지는 않다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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