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룡 Jan 23. 2024

나는 만 25세에 두 번의 뇌졸중을 겪었다.

재활 편

신경외과에서 해야 할 치료를 다 마친 나는 재활을 시작한다. 재활치료는 재활의학과로 전과해야만 하루에 2-3개씩 할 수 있었다. 타과에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의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신경외과에서는 전과를 추천했다. 그러나 재활의학과는 자리가 항상 부족한 듯 보였고 다행히도 전동을 신청하고 며칠 안 가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신경외과도 환자들의 연령대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재활의학과는 특히 높았다. 병실엔 나 빼고 전부 할머님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병실의 상황이고 재활치료를 하러 가면 내 또래 환자 나 초등학생정도의 아이까진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재활치료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아주 어린아이들은 볼 수 없었지만 재활의학과 병동엔 유모차를 타는 아기도 있었다. 그 아이는 나와 신경외과에서부터 같이 있다가 전과한 아이였다. 아마 그 아이도 수술을 하고 잘못되었나 보다 생각했다. 엄마품에 안겨 꺽꺽 우는 작은아이가 나와 같은 고생을 하고 시련을 견뎌내고 있다니 왠지 모를 위안이 되곤 했다. 또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 아이의 우는소리가 들릴 때면 나도 속으론 마치 수도꼭지가 열린 듯 울곤 했다. (모야모야병은 울면 과호흡이 와서 뇌혈관이 좁아져 힘 빠짐 증상이 생길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과한 재활의학과에서 약 일주일의 재활로 나의 상태는 불안하지만 약간 걸을 순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곳 재활의학과는 아주 중증의 환자들이 머무는 곳이었기에 나는 재활병원으로 전원 하거나 퇴원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다리에 비해 손은 회복이 더뎠던 나를 보곤 엄마는 재활병원에서의 입원치료를 이야기했다.  수술 이후 쉴틈이 없던 병원생활에 지친 나는 병원을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라며 울면서 호소했다.  같은 말인가? 그랬다. 작다고 할 수 없는 뇌 수술에서 깨어난 후 내 일상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몸이 너무 아파서 지치거나 조금 덜 아프거나, 재활로 지쳐 힘들거나 하여간 괴롭지 않은 날은 없던 것이었다. 우리 집 강아지가 너어무 보고 싶었다.

우리 집 갱얼쥐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집에 가서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재활로 하루하루 달라지는 나를 보니 재활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지인에게 소개받은 재활병원으로 전원 했다. 수술 후 내내 나를 간병한 엄마를 집으로 보내기 위해 재활병원에는 간호간병병동으로 입원했다.(간호간병병동은 아주 심한 중환자를 제외하고 환자에게 간호사나 요양보호사, 간호조무사 분들 이병실에 상주하며 간호 간병을 도와주는 병동이다. )그래서 간병인이 필요가 없다. 재활병원에서 주치의선생님과의 첫 상담 때 선생님은 걸을 줄 알며 한쪽 머리를 밀었고 아주 어린 나를 다른 환자들이 아주 신기해할 것이라 말해주셨다. 이건 실제 생활해 보니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만 25세에 뇌출혈로 재활을 하는 나는 어디서도 신기하고 특이한 존재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