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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룡 Feb 09. 2024

어서 와, 재활병원은 처음이지?

20대 중반 여자의 뇌출혈 편마비 재활병원 생활기

뇌수술로 인해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와 재활의학과를 거친 나는 결국 집이 아닌 재활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재활병원에 가기 싫어 엉엉 울기도 해 봤지만 사실 나에게 꾸준한 재활을 할 수 있는 재활병원 생활이 더 필요하겠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다른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오지 않았으면 큰일이었을 정도로 난 재활병원 생활 2주 만에 정말 놀라울 정도의 회복을 했다.


 사실 애초에 나는 매우 중증의 환자는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어쩌면 왼쪽의 팔다리를 아예 쓰지 못할 뻔했다가 신경과 감각과 힘에 약간씩 문제가 생긴 케이스였는데, 수술한 병원에서도 예상 재활기간을 두세 달 정도로 예상했었다.  재활기간은 사람마다 정말 천차만별이고 재활 속도 또한 재각기 다르다. 몇 달을 할 수도 몇 년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다른 중증의 환자들보다 재활을 짧게 하고 회복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고통을 느낄 것이고 감각이 떨어지고 움직임이 불편하며 힘이 떨어지는 나 또한 나만의 고통이 있다. 고통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정말 끝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듯이 이 재활병원 안에서도 고통 없는 사람은 없다.


일단 이 재활병원에 올 때에 나의 몸상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조금 불안하지만 곁에서 누군가가 봐주면 걸을 수는 있고, 손가락을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지만, 손끝에 감각이 아직 많이 떨어지고, 연하검사를 다 통과했고 일반식과 연하제를 타지 않은 물을 마시지만 삼키는 힘이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


내가 부모님과 이곳 재활병원에서 나의 주치의가 되실 의사분과 입원 전 상담을 할 적에 그분은 아마 내가 걸을 수 있고 다른 환자들에 비해 많이 어리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것이고 치료사분들은 치료할 때에 많은 욕심을 낼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셨다. 날 신기하게 보는 환자들의 시선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치료사분들은 주치의께서 해주신 배려 덕에 생각보다 무리한 치료를 하진 않으셨다. 사실 재활병원에 올 시기가 내가 수술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라 아직 몸에 많은 무리를 가하면 안 되는 때였기에 주치의 께선 우선 몸이 잘 회복되는 것에 많이 신경 써주셨다. 나는 모야모야병 때문에 뇌혈관 직간접문합술을 진행하던 중 직접술을 한 혈관에서 출혈이 발생하고 그 부분을 묶었기 때문에 사실상 간접술만 성공한 상태이다. 간접술을 해준 부분에 혈관이 자라나는 데에는 최소 3개월에서 6개월까지 소요된다. 고로 나는 수술은 했지만 당장의  혈관상태는 이전과 다름이 없고 오히려 뇌출혈로 인한 손상이 더해진 상황인 것이다. 하여튼 그래서 주치의께선 우선 손회복에 집중하자고 하셨고, (또 손이 가장 회복이 더딘 부위이기도 하다.) 난 하루에 손을 쓰는 작업치료만 3개를 하였다.(치료는 한 타임에 30분씩 진행된다.)


운동치료 2개, 손작업치료 3개, 기구치료(트레드밀) 2개, 연하치료 1개로 나의 하루 재활 시간표가 정해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어지럽거나 다리에 힘이 빠질 수가 있어 병원 내에서 이동할 때에 휠체어를 이용하였는데 이게 오히려 다른 환자들이나 병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 번씩 내가 걸어 다니는 것을 걸 본 병원 내에 휠체어 이송요원 분들은 나에게 걸어 다녀도 되지 않겠냐며 본인들의 과한 업무 스트레스를 나에게 핀잔을 주며 풀어내곤 했고, 병동내에 요양보호사 분들도 내가 왜 휠체어를 이용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괜히 한 번씩 쳐다보곤 하셨다. 재활치료실 내에 다른 환자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치료실내에서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는 데다가 머리한쪽은 밀려있고 걸어 다닐 수 있고 남들에겐 나의 불편한 부분이 잘 보이지 않으니 무례할 정도로 나를 대놓고 빤히 쳐다보는 환자들이 정말 많았다. 치료실에서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적이 정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도 어찌하랴, 그런 무례하고 불편한 말과 시선보다 난 나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본래 낯도 많이 가리고 낯선 공간에 대해서도 많이 불편해하며 잠자리도 많이 가려 집 밖은 어디든 다 불편해해서 잘 자지 못하는 꽤나 많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일로 몸이 크게 아프고 또 이런 몸의 불편함을 겪게 되니 항상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도! 어떤 일도! 나의 컨디션과 기분을 망가뜨릴 수 없다!! 불편한 일들이 내 마음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해도 난 지금 잘 먹고 잘 자야지만 끼니마다 약을 먹고 오전오후로 운동을 하며, 다음날도 개운하게 생활할 수 있다. 몸이 아프니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또한 매 순간 신기하다.


이번엔 병동과 병실 생활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볼까 한다.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난 간호간병통합병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곳은 보호자가 상주하지 않고 병실마다 담당 요양보호사들이 보호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들은 항상 환자를 지켜보며 사소하게 움직이는 것부터 화장실에 가는 것, 밥 먹고 씻는 것까지 관여한다. 난 이곳에 올 때에 혼자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고 생활에서 대부분의 것이 혼자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큰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정해진 날 샤워를 할 때는 무조건 요양보호사분이 대부분의 과정을 도와주시며 혼자 씻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것은 아마도 혹시 환자가 혼자 하다가 다쳐서 소란이 생길 것에 대비한 병원 측에 방침이 아닐까 싶다. 층마다 간호사스테이션도 마련되어 있어 수시로 간호사들이 병실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확인하곤 한다. 또 문제가 있을 경우 간호사분께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


20대의 젊은 여자 환자로서 내가 느낀 이곳 병동과 병실의  간호사와 요양보호사 분들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내가 비교적 어린 환자기 때문에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잘 챙겨 주시는 분들. 둘째는 내가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만만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대하는 분들. 이렇게 아주 극명하게 나뉜다. 어떤 분들은 내가 어려도 항상 ~씨 라고 하며, 존댓말로 대해 주시고 또 어떤 분들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반말로 대하시곤 한다. 이것은 비단 말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나 분위기의 문제 이기도 하다. 후자로 나를 대하는 분들에게선 확실히 나를 어리다고 만만하게 얕잡아 보시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크게 신경 쓰며 생활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불쾌할 정도로 무례한 분이 있을 때가 있다.


나는 4인실에서 생활하는데 처음 들어간 병실에서는 맞은편엔 울산에서 오신 울산이모님이 옆엔 수원이모님이 계셨다. 울산이모님은 처음엔 뇌출혈 재활 때문에 이 병원에 오셨다가 최근엔 가끔씩 무릎관절 주사를 맞으러 오신다고 했고, 수원이모님은 뇌경색 재활로 대학병원에서 전원 하신 분이었다. 수원이모님은 다친 부위가 굉장히 광범위하신 지 기억의 일부분도 잃으신 모양이었고 인지능력 부분에서도 살짝 불편하신 듯했다. 사실 제일 불편할 것 같은 건 본인이 어떤 부분을 다친 건지 다 알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모른다면 본인은 편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이모님을 볼 때 그 점이 제일 슬프면서 안타까웠다.


 울산이모님과 수원이모님의 성격은 정 반대였는데, 울산 이모님은 모든 일에 둥글둥글하게 대하시며 크게 감정적이지 않은 분이셨고, 수원이모님은 좀 더 감정의 변화가 잦으시고 가끔 날카로우시어 요양보호사 분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나와 울산이모님과의 마찰은 생길일이 없었지만 가끔 요양보호사에게 화를 내실 땐 병실분위기가 싸늘해지곤 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원이모님은 뇌에 어떠한 부분을 다치신 것 때문에 기질적으로 많이 예민해지셨다고 하셨다. (본래 성격이 불같은 건 있으신 듯했지만...) 그러다가 울산이모님은 내가 입원한 지 얼마 안돼 퇴원하셨고, 나와 수원이모님은 병동 사정으로 다른 병실로 이동하게 됐다. 이동한 병실은 기존의 병실보다 훨씬 중증환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이미 중증의 환자 두 분이 머물고 계셨다. 이동한 후로 나는 원래보다 이모님과 좀 더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이동한 후로 어떤 동지애를 느꼈달까 하여튼 이모님은 한 번씩 살아오신 세월, 연륜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딱! 꽂히는 말씀들을 하곤 하셨다. 어느 날 그 요양보호사는 내가 보기에도 태도가 참 별로 셨는데, 그분과 한바탕 말다툼을 하시곤 "어른들이 알고 보면 더 불량해"라는 말을 하셨다. 다른 어느 날엔 나와 몸상태에 대해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시다가"재활도 세월이 약이야. 시간과 나의 뼈와 살이 같이 가야 하는 거야. 아기들이 걸음마를 떼듯이 손을 잼잼 하면서 점점 커가듯이(처음 손에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주먹을 쥐었다 피는 것도 매우 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게 다시 나아가야 하는 거야. 그냥 함께 살아야 하는 거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이 너무도 가슴에 닿았다. 다른 재활은 모르겠지만 뇌관련한 재활은 병원에서도 그저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빨리 좋아지진 않는다 했다. 몸이 저절로 회복하는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에 회복속도가 미미한 듯 느껴지더라도  재활 치료를 꾸준히 하다 보면 몸이 따라오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확 폭발적으로 회복이 되기도 한다. 이모님도 이런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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