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 네가 웃을 줄 몰라서 그래. 웃으면 행복하단다!”로 대표되는 긍정심리학과 행복론이 넘쳐흐르는 시대에 웃지 못하는 나는 불감증 환자인가, 조커인가? 성공론이 대두되는 시대에 불신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나는 음모론자인자, 비관주인자인가? 나에겐 조르주 비제처럼 황홀한 음악을 생산할 재주가 없으니 그저 음악을 즐김으로써 가상세계에 접속해볼까? 긍정심리학과 행복론이 잠잠해지는 그날까지! 1)
시간의 예술이라 불리는 음악은 자신을 망각하고 탈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가상세계를 제공한다. 도취 상태에서 탈주체의 자유를 누리며 잠시나마 현실세계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끝나는 그 순간 물아의 경지에서 추방되고 건조한 현실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눈앞에 다시 펼쳐진 현실세계의 늪에서 누구는 심한 구토증을 겪기도 한다. 이처럼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으로, 누군가에게는 잠시나마 맛보았던 희망조차 무의미해지는 허무로 남기도 한다. 2) 영화 한 편을 몰입해서 보고 난 이후 영화관을 터벅터벅 걸어 나올 때의 미묘한 느낌을 떠올려보아라.
가슴을 일렁여주었던 조르주 비제의 음악을 끝으로 다시 마주한 현실세계는 라디오 잡음처럼 어수선하다. 자유를 버릇처럼 내뱉는 사회는 각자도생이 지배하는 전쟁터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언제나 행복 담론이 양산되고 커진다. 행복론은 고통과 불쾌로 가득한 세계를 뒤로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관심은 기껏해야 일기를 쓴다든가, 심리 상담을 받는다든가, 헬스가 전부이다. 그것만으로는 고독과 무기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며 결국 자기 연민과 자기 침잠에 빠진다. 무력함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아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아가 접속하는 것이다. 3)
문제는 바깥으로의 출구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과 접속하면 좋은데 온갖 제도와 사회 분위기가 그것을 막는다. 4) 자기로의 관심만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자는 행복을 거부하는 머저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이 바깥으로의 출구 대용으로 스마트폰을 꼽는다. 언제 어디서든 접속하여 쉽고 빠르게 나와 코드가 맞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깥’으로 여겨지는 스마트폰 속 가상세계는 철저한 자기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이다.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고 무시하는 동종교배 집단으로 둘러싸인 ‘안’일 뿐이다. 타자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 타자 속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다. 결국 고독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바깥으로의 여정은 자기 안으로 귀결되고 만다. 무력함이라도 해소되면 좋으련만 스마트폰 접속 이후 마주한 현실세계는 여전히 신음으로 가득하고 허무는 증폭된다. 이런 후폭풍을 감당하기 두려워 또다시 가상세계로 도망가고 끝내 노예가 되어 스마트폰에 시달리게 된다.
가상으로부터의 복귀가 없으니 현실세계도 점차 가상처럼 여겨지는, 이른바 준(準)가상 현실세계가 도래했다. 주말을 위해 주중을 살아가는 것이지 주중을 위해 주말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을 유일한 자아실현이라 치부하는 사회에서는 주중이 우선이며 주말은 주중을 위한 휴식 시간일 뿐이다. 이처럼 현실의 쓰라림을 완화하는 수단이었던 가상세계가 이제는 목적으로 전복됐다. 스마트폰 속 가상세계 접속을 위해 현실세계를 버텨야 한다.
현실과 가상의 중첩인 준가상 현실세계는 혼란스럽다. 현실세계의 룰과 가상세계의 룰 사이에서 끝없이 줄다리기 해야 한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웃는 자는 마음껏 가상세계의 룰을 적용하는 권력자뿐이다. 그들에게 타인은 자신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NPC(Non-Player Character)이다. 불리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차단하면 그만이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입을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소리는 새어 나온다. 삐져나온 소리는 현실세계 사람들을 고양시킨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억눌린 소리는 더 큰 힘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바깥으로의 출구를 지속해서 두드려야 한다. 긍정심리학과 행복론이 메아리치는 준가상 현실세계에 틈을 내어 바깥으로의 접속과 소통을 들여야 한다. 물론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바깥 세계에 맞서 완강하게 자기의식을 고집하면 부정적 감정에 시달릴 뿐이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바깥으로 나아가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주체,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거주하며 ‘그래, 다시 한번!’을 외치는 자만이 행복을 구성할 수 있는 자유인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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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구용, “비정상의 정상화, 정상의 비정상화”, 『경향신문』
2) 박구용, 자유의 폭력 (길, 2023), 79pg
3) 같은 책, 512pg
4) 같은 책, 512pg
5) 같은 책, 511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