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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09. 2024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의 작은 섬 두 개

사주와 팔자 - 선택과 믿음


저는 원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혈액형은 당연하고 MBTI나 사주 혹은 타로 같은 걸 잘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난을 칠 때나 남들과 친해질 때 가끔 사용할 순 있을 정도로는 알고 있네요. 뭐 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주변에 사주를 잘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웃어넘길 뿐 그들의 말을 잘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일시가 그렇게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차라리 수정된 날짜가 더 명백한 수치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너무 확정적으로 말하며 나에 대한 사전 정보들로 짜 맞추는 걸 별로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사주는 MBTI 같은 거예요라고 말하는 분을 만났네요. 과학으로 보면 바보 같지만... 인문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이 갔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아무것도 믿지 마세요라고 하며 제 19971207 이라는 숫자를 받아 갔을 때... 솔직히 약간 기대하기도 했네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둘 다 관심 있고 실제로 공부를 하는 분을 보는 게 쉽진 않으니까요.


 천기누설의  업보를 언급하며 실제적인 접근을 조심하려는 탓에 확정적인 걸 듣지는 못했지만(솔직히 그런 게 더 좋다 생각합니다. 괜한 말은 괜한 죄와 고통을 낳습니다.) 그래도 너무 저에게 근접한 말들이 많아서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사주 한줄평은...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의 작은 섬 두 개.


 저는 작은 물 같은 걸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구체적인 이미지에 놀랐네요. 강이라 길래 작은 물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 정도면 작은 물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억 남는 걸 몇 개 생각해 보면.


-사주에 취직이 없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데 그게 어디에 소속돼서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이 많아 대인 관계가 원활할 것. 부드러운 다리의 역할.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 붙이길 좋아함 사디즘보다는 성취적인 측면. 그 단단함이 섬 두 개.

-기가 약함 수용적 측면이 강함

-꼽사리 끼기와 아는 척을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음, (이것도 개 웃긴 게 ㅋㅋㅋ 내가 젤 싫어하면서 젤 좋하는 것들 모음임)



 물 위에 작은 섬을 소중하게 여기시길...이라는 말로 저의 겉핥기 사주 풀이는 끝났습니다. 


 뭔가... 와닿는 말이 많아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사주에서 얼음이라는 비유가 신기해서 더 질문을 해 봤네요. 


 얼음을 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흠... 아내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이 얼음은 강박적인 강박자의 얼음인데 그러니까 딱딱하고 경직된 강박의 표상입니다. 이건... 히스테리적 여성과의 관계가 좀 해빙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멱살을 잡고 흔드는 시늉을 하며)

 이래도 안 바뀌어? 날 안 사랑해? 이런 여성분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걸 듣던 저와 제 친구는 크게 웃었습니다. 말씀하시던 분이 당황할 정도로, 


 ㅅㅂ... 내 방에 cctv 달아 놨나?


 너무 제 연애사랑 비슷해서 웃겼네요. 그냥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일까요? 아무래도 옛날의 사랑은 결혼밖에 없었으니 이젠 그런 식으로 해석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게 타고난 성질이면 나도 진따 대단타... 뭔가 <팬덤 스레드>를 보며 떠올린 감각을 그대 느낀 것 같습니다. 내 삶은 언제부터 꼬인 걸까. 엄마 제때 낳아주지... 왜 빨리 낳아서 시간선을  꼰거야...


그다음은 야매 사주사이트에서 분명 불땅이라고 나왔던 친구의 차례였습니다. ㅆ 상극이라(제가 작은 물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큰불과 큰 땅과는 좋지 않은 궁합이라더군요) 잘 안 맞는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저랑 아주 유사한 사주라고 하더라고요. 거대한 물이 고여 있는 것. 그래서 얼어붙은 태평양이라 그랬더니 일정 부분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셨네요.


 그리고 소름 돋게 그 친구와 잘 맞는 해석 풀이들을 듣다(프라이버시상 스킵 근데 ㅋㅋㅋ 마지막에 '너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라는 말에 폐부를 찔린 표정이 개 웃겼음 ㅋㅋㅋ) 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친구랑 저랑 상성은 어때요? 제가 작은 물이니까 맨날 먹히기만 하고 안 좋은 거 아녀요?


 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게 일종의 비서라고 해야 할까요? 사장님이 일을 할 때 비서가 연락을 돌리고 사람들을 모으잖아요? 바다로 가는 물은 비를 통해서 생기잖아요. 그리고 그게 강을 통해 흐르고. 그런 역할을 작은 물이 하는 겁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큰물과 연결시키는 거죠. 큰물이 철학을 만들면 그걸 실현하는 게 작은 물입니다. 둘 다 각자의 쓸모가 있는 거지 위계를 말하지 않아요. 일종의 윤활류라고 할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 그 말을 듣고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연극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제 역할은 그런 역할이었고 잘 수행하고 싶었지만... 큰물의 철학이 너무 제 맘에 들지 않아서 결국에는 좀 틀어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또 웃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난치듯 물었죠.


 그러면 사장이 비서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하면 비서가 많이 짜증 나겠네요? 그쵸. 


 그렇겠죠.


 그리고 그러다 망하면 거봐라 이렇게 해도 되겠네요.


 그쵸. 근데 그게 사실상 작은 물이라는 증명이에요. 한쪽이 큰 물이거나 혹은 다른 사주를 가졌다면 실망해서 그냥 떠나버리거나 자기가 새로운 리더가 되려 했겠지만. 거기서 옆에서 구박하고 있는 건 결국 떠나지 못하는 작은 물입니다. 비서는 원래 그런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짜 이 사람 우리를 몰래 보고 온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이 마주치고는 또 빵 터져버렸네요. 그 친구와의 관계성 그 차제라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렇게 구박하고 욕해도 아직 친구니까요.


 물론 이건 모두 사주를 겉핥기로만 배운 저의 사기입니다... 믿지 마시길. 사주를 따른 것도 개척하는 것도 모두 본인의 몫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개웃긴 천기누설 사주 시간은 끝났습니다.


 뭐랄까 너무 실제적인 사건들과 맞닿아 있어서 놀랐던 시간이었네요. 진짜 사주라는 게 있나... 사실 이런 건 고민하는 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었나 힘이 되었나 그게 중요하죠.


 사람은 당위성 있는 미래와 현재를 만나면 불안이 주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 나는 잘하고 있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감각이 포함되어 있는 경험이니까요. 아마도 사주는 그런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 정해진 천성이 있다는 것. 너무 매몰되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안정제의 역할을 해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많이 만난 분은 아니지만. 그분이 뛰어난 통찰력을 가져서 저와 그 친구를 파악한 다음 사주 데이터를 보고 짜 맞춘 걸지도 모릅니다. 혹은 제가 몇몇 개의 경험을 토대로 그걸 맞다고 잘 못 판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구분이 뭐 중요할까요. 삼국지는 진짜가 아니고 그걸 가장 재미없게 읽는 법은 정사랑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MBTI도 과학적인 견해가 이성적인 견해가 들어가면... 정말 재미가 없죠. 의미도 없고(그래서 MBTI에선 T가 천민 취급인가 봅니다), 사주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톺아보며 웃고 현재의 선택에 대한 불안 줄이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면... 꽤 멋진 삶의 도구 아닐까 싶네요.


 물론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사주풀이는 썩 좋지 않다 생각합니다. 연애 전에 결혼 전에 사업하기 전에 꿈을 찾기 전에... 사주를 보고 그것을 믿어버리는 건...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겠죠. 아마 그분이 말한  '천기누설'역시 그런 업보 아닐까 싶습니다. 괜히 미래에 참견해서 생기는 수많은 화를 '천기누설'이라는 한마디에 녹인 거죠. 미래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지만 괜한 말로 그 책임을 사주쟁이가 지게 될 테니까요. 언제나 섣부른 말은 화를 부릅니다. 사주나 타로는 사람과의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웃으면서 그래서 우리가 그랬구나 웃으면서 들을 수 있게. 


 그래도 되게 재밌는 경험이었네요. 뭔가 엄청 찔리기도 하고. 근데 이럴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사주 풀이를 들으며 나를 알 때,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을 배울 때. 뇌과학을 보며 불안 통제법을 알아 갈 때... 같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와 공감을 나눈 건데. 이거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이미 하고 있던 거잖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네요. 이게 뭐 오만하거나 건방진 말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고 우리는 그걸 이미 다 알고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운동과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일종의 뇌과학적 불안의 해소이고

아무 신이나 만들어 믿을 수 있는 저의 능력은 키에르케고르의 확신에 가까우며

저는 진짜 우습게도 사주에 하나도 저항하지 않고 되는대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아는 건 쉬운 말은 아닙니다. 알면 행동으로 나오니까요. 얼핏 알고 있다 따위는 안다라고 말하기엔 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재되어 있는 건 확실하고 어느 순간 자극으로 인해 그게 구체화가 될 때... 확 열리는 감각을 '깨닫는다'라고 하지 않나 싶네요. 결국 깨달음은 너 안에 있다고 말한 부처의 말이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저는 팔자라는 말을 꽤 좋아합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만큼 바꿀 수 있는 만큼 맨땅에 헤딩하는 저지만... 오히려 그렇게 미친 듯이 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팔자라는 감각입니다. 그냥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라는 폭력적인 완결성은 도리어 저에게 편안함처럼 다가오고 코앞의 과제에 미친 듯이 열중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근데 사주도 그렇게 나오니 좀 씁쓸하긴 합니다... 저는 쉽고 행복하게 살기는 좀 어려운 팔자인가 봅니다. 


 항상 떠돌아다니며 큰 고통을 짊어지고... 이상한 여자랑 살아가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게 팔자인가 보죠. 


 확실히 평범한 감각은(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 부러운) 저에게 잘 맞진 않나 봅니다. 엄마아빠누나는 잘 그렇게 살던데. 왜 나만 이런 건지. 아니면 다들 팔자를 꺾은 죄를 삶으로 갚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태어날 팔자였나 보죠 뭐.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에 섬 두 개...


ㅅㅂ 타입은 개쓰레기네. 마하펀치에 즉사할듯.



 이것도 나름 커여운 것 같습니다. (목 길면 사슴이지)


 작은 물이 큰 물보다는 더 귀엽네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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