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작보다 학위 논문 주제와 관련된 연구를 일관성 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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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논문이란 것에 대한 이해를 잘했다고 치자. 그 이후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마냥 논문을 많이 투고하면 지도교수님께서 알아서 졸업시켜 주실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논문 자체를 잘 이해했다는 가정하에, 이제 '어떤 주제의 논문을 투고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한 줄로 요약하자면, 졸업을 위해서는 나의 학위 논문의 대전제나 큰 철학이 계속 이어지는 연구를 투고해서 논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을 N 편 게재했다고 졸업하는 것이 아니다
논문을 많이 쓴다는 것. 사실 나는 무조건 논문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에 옹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박사 과정 학생들은 논문은커녕 긴 글을 작성해 본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자세히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후일에 좋은 논문을 작성해야 할 시기를 위해 습작을 한다는 취지로 보았을 때, 논문을 게재하고자 아웅다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 나는 양질의 글은 많은 경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 믿고, 실제로 나의 경험상 박사 과정 매 해마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것을 몸소 경험하였다. 둘째, 논문 작성의 템플릿에 익숙해지게 된다. 나는 현재 MIT에서 포닥으로 근무 중인데, 친구들의 논문을 교정할 때, 해당 학회지나 저널의 템플릿을 잘 따르지 못하거나, 문맥상 의미는 맞지만, 처음 이 분야를 접하는 이가 글을 읽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게끔 모호한 표현을 쓰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다 더듬더듬 말하는, 영어도 잘 못하는 동양인 포닥이 알고 보니 scientific writing은 고수?!. 즉, 영어 실력과 상관없이, 논문 작성은 가이드라인 없이 작성할 경우 틀리기 쉬운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corresponding author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의 박사 과정을 돌아봤을 때 아쉬운 점은 논문을 많이 게재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생각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 중 해외 학회지에 논문이 게재되면 해외 경험을 무료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년 돌아오는 로봇 분야 학회에 무조건 논문을 투고하려고 아웅다웅했다. 즉, '내가 왜 이 논문을 투고/게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자면, 나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지면 인식 기반 지상형 자율 주행 로봇을 위한 강인한 라이다 SLAM 프레임워크'인데, 22년도 9월에 뜬금없이 레이더(레이더는 radar이고, 라이다는 LiDAR임. 둘은 다른 센서다)를 활용해서 매핑을 하는 연구를 진행했었다.
(코드에 관심 있는 분은 아래 링크:
- https://github.com/url-kaist/outlier-robust-radar-odometry
- https://github.com/gisbi-kim/navtech-radar-slam)
나는 이 연구를 늘 '레이더 찍먹(깊게 이 분야를 팔 생각보다는 잠깐 발만 담가본다는 의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1) 이 주제를 이어서 할 후배들도 없고, 2) 그렇다고 내가 이 연구의 후속 연구를 할 시간도 없으며, 3) 레이더 관련 과제도 연구실 내에 없는 점이 아쉬웠다 (사실 이건 후일담이긴 한데, 레이더 관련 연구를 하게 된 이유는 모 회사에서 과제 관련 미팅을 나의 지도 교수님께 요청해 놓고선, '그 연구실은 레이더 연구도 안 해본 거 같은데, 레이더로 SLAM(로봇으로 주변 환경의 지형지물을 파악해서 지도를 만드는 기술) 하실 수 있겠어요?'라며 비아냥거리는 걸 보고 참을 수 없었다...내가 욕먹는 건 넘어가도 연구실이나 지도교수님을 욕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이 논문이 게재되었다 치고, 그다음 너의 연구 계획은 뭐냐?'라고 물어봤을 때,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radar 논문은 한 번 연구하고, 그 이후로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박사 학위 디펜스나 졸업 논문에는 당연히 내용이 일절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원래 나의 메인 분야가 아닌 분야도 한 번 경험해 봄으로써,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실험하는지를 알게 된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고, 연구자로서 성장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향후 내가 교수가 되어 과제에 지원할 때도 더 폭넓은 주제로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지만 순전히 졸업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면(기억하자. 이 글은 3년 졸업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회고 및 조언을 하기 위한 글이다) '그래서 네가 궁극적으로 풀고자 한 문제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해 학생이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연구를 수행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도교수님의 성향이나 스타일에 따라 a) 애초에 학위 논문의 대주제를 생각하고 지도를 해주시는 분도 있고, b) 학생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것을 굳이 막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투고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교수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만약 자신의 지도 교수가 전자의 경우라면, '교수님 지대한 관심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며 매일 교수님 오피스 방향으로 절하면서 감사히 대학원 생활을 하길 바라고,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학생 스스로가 자신이 이 주제에 대해 투고를 할지 말지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래와 같이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 연구를 하면, 박사 학위를 받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사 과정에서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고 여러모로 유익하다. 하지만 내가 낸 논문이 '게재됐다 치고,' 그 이후를 미리 한 번 생각해 보자. 즉, 본인의 연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그 연구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그리고 현재 투고된 논문이 게재된다면 그 연구의 후속 연구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미리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연구의 목적성과 방향성이 뚜렷해지며, 박사 디펜스를 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단순히 저명한 학회에 나온 최신 기술을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는 연구의 일관성이 부족할 수 있으며, 박사 학위를 받는 기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그리고 높은 확률로 학생의 철학이 덜 담겨 있는 무지성 SOTA 활용 논문은 지도 교수님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박사 과정 중에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산발적으로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 박사 학위는 '논문 많이 썼고 이것저것 많이 했다'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박사 1년 차까지는 이것저것 많이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시기는 머릿속에 입력값들이 부족한 시기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사 2-3년 차 정도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박사 학위 때 제시할 문제점(research question)을 잘 정의 내리는 것이 좋다. 그 후, 일관성 있게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이 게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펜스의 PPT 자료나 학위 논문의 원고로 활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회지에서 발표했던 자료들이나 저널에 게재한 manuscript를 재탕할 수 있게, 전략적으로 자신의 연구가 지금 자신의 research question의 큰 줄기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늘 self-feedback을 해보며 연구를 진행하자.
만약 연구 주제들이 다들 매력적이어서 해당 연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연구 주제를 후배들에게 나눠주거나 동료들과 적절히 땅따먹기 마냥 주제를 나눠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나도 박사 말년 차 직전까지는 연구실 동료와 동일한 주제로 연구하다가, 박사 말년 차에 서로 주제를 '나는 LiDAR, 너는 vision'으로 암묵적으로(?) 나눴다. 이렇게 주제를 나눈 이유는, 생각해 보라. 내가 연구실 동료와 비슷한 시기에 디펜스를 하는데 졸업 주제가 너무 유사하다면 심사위원으로 오신 교수님들도 평가하시기에 당황스럽고, 그렇기에 상황이 애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의 연구가 상호 보완될 수 있도록 주제를 배분하면, 개인의 연구뿐만 아니라 팀 전체의 연구 성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또한, 내가 메인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으나 연구실 동료 덕에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는 것들은 졸업 후 큰 자산이 된다 (이 자리를 빌려 나와 함께 졸업한 송승원 박사와 이준호 박사에게 무궁한 감사의 말씀을...!). 특히, 논문화까지 했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박사 주제로 어떤 research question에 깊게 계속 논문을 쓰고, 연구실 동료들 덕에 다른 주제들로 공동저자로서 논문을 몇 편 게재한다면, 연구자의 커리어 입장에서도 T자형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
사실 박사 과정에 정답은 없다. 모두 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조언해 줄 뿐이기 때문이다. 무튼 이 글의 요지는, 논문을 많이 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목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인의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이를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연구의 일관성과 목적성을 유지하면서, 지도교수님과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자신의 연구 계획을 구체화하고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 지도 교수님을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하지는 말자...!
내가 박사 졸업할 때 지도교수님과 선배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민했던 내용을 이렇게 공유하며, 여러분의 박사 과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연구자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철학과 목표를 잃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이루고,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