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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온 May 04. 2024

여행에 질렸지만 다시 여행을 찾는 이유

EP9. 직장인이 되어서도 나의 취미는 여행입니다.

20대가 되어 내가 가졌던 취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여행, 둘째는 뮤지컬과 연극 관극이었다. 둘 다 돈이 많이 드는 취미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관극을 줄였고, 그렇게 나의 취미는 여행으로 굳어졌다. 학생 시절부터 매 방학 때마다 줄기차게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다니면 다닐수록 무뎌진다. 처음 느꼈던 공항에서의 설렘, 비행기가 뜨는 순간의 두근거림, 낯선 곳의 나에게서 느끼는 신기함은 줄어들고, 새로움에도 무뎌진다.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의 개수 자체가 줄어들었고, 새로운 자극 자체에 무뎌지기도 했다.


교환학생으로 3개월 미국에 머물렀을 때 나는 여행에 질려버린 정점에 있었다. 몇백만 원을 넘게 쓰고도, 막상 여행을 끝내고 와서 너는 뭘 배워왔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라거나 사람과의 갈등해결능력 같은 것은 늘었겠지만, 진짜 느낀 점 하나 없는 여행도 있었다.




"내가 여행을 왜 좋아했나" 고민에 빠졌을 때,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를 읽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좋아했었던 이유는 조금 알 것 같아졌다. '내 삶의 주인이 된 기분' 때문이었다. 나는 내 결정 하에 새로운 것에 열정을 쏟는 내 모습을 좋아한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여행에서는 이걸 백만 번 해볼 수 있다. 출발하는 티켓을 끊는 순간부터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만 하고, 새로운 것을 계속 찾아봐야만 하며, 직접 해보고, 부딪혀볼 수 있다. 책에서는 이걸 '통제력'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장기 여행에서 가끔은 집에 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순간들은 결국 여행에서마저 이 통제력이 내게 없다고 느꼈을 때였다. 일행과 관계가 나빠지며 의견 조율이 힘들어졌을 때,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어졌을 때. 여행에서마저 무기력감을 느끼고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그럴 때는 집에 오고 싶었다.


요즘은 비행기를 탔을 때 설레는 감정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서 슬프다. 책에서 비행기를 탈 때 삶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고 표현하는 것을 읽었을 때, 이유를 알아냈다. 이 감정마저도 이전 여행으로부터 남은 경험들이 만들어낸 것 같다. 경험에서 얻은 무의식 속에, 이 여행에서도 통제력이 나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량처럼 느껴진다.'
- 김영하 작가, 여행의 이유 중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 기간 동안 내 삶은 유랑이었다. 불안정하고 막막했다. 1년 넘게 긴 여행 같은 취업준비 기간을 끝내고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설렘을 느끼지 못함에도 다시 여행을 찾는다.


회사원의 삶은 안정적인 '생활'에 가깝다. 늘 반복되는 사이클 속에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버는 '생활'. 회사원의 생활에서는 과거 학생시절보다 더 '통제력'을 가지기 어려워졌다. 내 선택보다 상사의 선택이, 회사의 선택이, 나의 행동과 열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퇴근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회사일 말고 할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생활'을 벗어나 통제력을 붙잡고자 다시 취미로 여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 말고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여행'을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무작정 일상에서 탈피해 여행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여행은 떠나 있는 순간만 나에게 통제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가기 전의 기대'와 '갔다 온 후의 추억 되새김질'도 나의 생활에 잠깐의 통제력을 준다. 이번 상반기는 집에서 쉬어볼까 했는데, 막상 쉬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여행을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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