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19. 이혼 95일 차
119. 이혼 95일 차
“커피 한잔 마시고 가!”
2014년 6월 3일 화요일 비
비는 새벽부터 내렸다.
그리고 부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 시간까지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쓰기에는 귀찮을 정도의 비가 끈질기게 내렸다.
오래전, 이들 부부가 처음으로 이혼을 위해 법정을 찾던 그날도 비가 내렸다. 그때의 비는 폭우였다. 바짓가랑이가 모두 젖었다. 그날 이혼하지 못한 것은, 처음으로 생긴 ‘2주간의 조정 기간’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들 부부는 이혼에 실패했었다. 아이들이 중학생 때였다.
여자는 생리 첫날이었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침대 시트가 피에 젖지 않도록 수건을 깔고 부드럽고 서러운 행위를 했다. 만감이 교차하고 슬펐다. 그리고는 다시 잠에 빠졌는데, 꿈을 꾸었다. 단편적인 꿈을 계속 꾸었고 헛소리도 했다. 그러다가 눈을 뜬 것이 그 시간이다.
“어, 9시 20분이다.”
10시까지 법원에 가서 ‘협의이혼 의사 확인’을 받아야 한다. 여자는 검은 땡땡이 모양의 바지와 간단한 셔츠, 푸른색 재킷을 입었고, 그는 어제 입었던 핑크색 셔츠와 바지를 그대로 입었다. 물론, 재킷과 구두를 트렁크에 실어뒀으나, 비도 오고 귀찮아서 갈아입지 않았다.
다행히 가정법원은 시간 내에 도착했다. 50여 쌍의 부부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법원 남자 직원이 협의 의사결정을 위해, 판사님이 질문할 때 대답해야 할 요령을 설명했다.
“판사님이 질문을 하면 예, 아니오.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뭐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니 해 줄 수밖에요, 라거나 하면 안 됩니다. 차라리 ‘생각하게 1주일만 연기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세요. 우유부단하게 하거나 판사님께 질문을 하면 뒷사람들이 많이 늦어집니다. 행정적인 절차는 우리가 알려 드릴 테니 판사님께 질문하지 마세요.”
이어, 이들 부부도 법대 앞에 섰다. 신분증으로 당사자임을 확인하자 “두 사람이 협의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습니까?”라고 묻고, 이어, “자녀 양육에 대해 매월 28일 날, 150만 원을 지급키로 한 사실이 있습니까?”라거나, “접견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09시부터 20시까지, 또는 자녀가 원하는 데 언제든지 하기로 한 사실이 있습니까?”라고 이미 합의한 내용을 확인했다. 물론, 이들 부부는 그때마다 “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혼이 성립되고 결정문도 받았다. 같은 시각, 법정 밖에서는 촬영이 있는지, 야외조명과 깔이 다른 여배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법원을 나와 ‘이혼 신고’를 위해 서초구청으로 향했다. 여자가 “내가 차에 있을 테니 혼자서 하고 와.”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서류 뗄 거 있을지도 모르니까 같이 가자.”라고 말해, 동행했다. 구청엔 법정에서 본 남녀들이 몇 명 보였다. 그가 이혼신고서의 빈칸을 작성하고 여자에게 내밀어 서명하도록 한 후 창구 공무원에게 접수했다. 담당 공무원이 건조한 음성으로 “다음 주 월요일쯤 정리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침을 먹지 않았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헤어지기 뭣해서 밥을 먹기로 했다. 여자가 “청국장 코스로 먹을까?”라고 말했다. 이에, “청국장도 코스가 있어? 그런데 좀 그렇다. 간단히 먹자.”라고 말하며, 늘 갔던 설렁탕집 옆 순댓국집에서 선지해장국을 주문하고 한 그릇은 포장했다.
빨간 벤츠 SLK 로드스터를 함께 타고 집으로 향했다. 여자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하 주차장에 진입할 때였다.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고 말했다. 그가 “아냐, 오늘은 그냥 갈게.”라고 거절하고 내려주고 차를 돌렸다. 주차장을 나서자 빗방울이 앞 유리창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렇게 이들은 남남이 되었다.
그는 방배동사무소에 들려 ‘지방세 완납증명’을 발급받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ㅇㅇ은행 조 과장에게 서류를 팩스로 보낸 후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세탁기에 넣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스스로 의식했다. 그런 후 하얀 바지와 푸른색 셔츠를 입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볼보 차량용 배터리가 도착했다. 공구를 챙겨 벤츠 트렁크에 넣어두고 드럼 연습을 조금 한 후 학생회 공ㅇㅇ 학우의 방문을 받았다. 원래 방문 목적은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할 한ㅇㅇ 학우가 앰프 시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공ㅇㅇ학우가 “한ㅇㅇ 학우는 부모님이 양평에서 장어구이 식당을 하잖아요. 그런데 주차장으로 쓰는 곳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서 그 일로 기분이 우울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군요. 사실 오고 안 오고는 별로 의미가 없죠. 또 필요한 것이 있나요?”
공ㅇㅇ학우는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 일일호프 행사 장소로 제공한 지하 홀의 준비 준비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어, 디테일한 행사내용에 대해 그의 의견을 구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학생회 일에는 관여할 일이 없어요. 장소를 제공한 것으로 끝내렵니다.”
그는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 학우들에게 적지 아니 실망했다. 그 실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조차 피곤하게 하는 잔머리였다. 물론 공ㅇㅇ학우도 이해했다. 두 사람은 [내 살던 고향]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파전에 막걸리를 주문했다. 그러나 공ㅇㅇ학우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오늘 결혼생활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에 술이 아니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막걸리 세 병을 비웠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잡아 학우를 태워 보내며 만 원권 두 장을 손에 건네며 “편하게 가셔.”라고 말했다.
편의점에 들러 ‘토닉워터’를 샀다. [미조사]에서 맞춘 바지는 종아리가 쪼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진토닉에 취해 잠이 들어야 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