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노출로는 배울 수 없는 것
듣지도 못하는 걸 배우는 마법
아이는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가?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필요한 두 가지 핵심은 언어에 대한 노출과 상호작용이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잠시 살펴봤듯이, 상호작용만으로는 언어습득의 미스터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모국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가 가리키기, 눈 마주치기, 단어 반복과 같은 행동 만으로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약 생후 2년 만에 복잡한 문법 표현과 (예: 문법적인 성, 관사 등), 추상적인 개념을 습득한다. 성숙한 뇌를 가진 성인이 제2 외국어를 배울 때 맞닥뜨리는 좌절을 생각해 보면, 뇌가 발달 중인 아이가 태어난 지 2~3년 만에 문법을 대부분 마스터한다는 건, 미스터리다. 이를 영유아기 때의 상호작용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한 노출이 답인 걸까? 복잡한 언어학 개념은 내버려 두고, 우선 언어 노출 (exposure)에 대한 개념을 정의해 보자.
노출
언어 노출이란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낸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출이란 어떤 것에 직접 접촉하거나 흡수를 통해 대상과 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대화를 하는 소리를 듣는 것.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없는 그 말을 듣고 누군가가 어떤 행동이나 대답을 하는 것. 그런 상호작용을 보고 언어를 접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자, 그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며 한국어를 쓰는 아기들이 문법 개념을 어떻게 배울지 한번 상상해 보자.
양육자 1: 밥 먹었어?
양육자 2: 아까.
양육자 1: 그럼 좀 갈아 줄래? [기저귀를 보고 눈짓을 한다] 밥 좀 먹게.
양육자 2: 아, 응.
위 문장을 읽으며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가는데?' 하고 반응한 독자가 있다면! 손을 들어주시라. 없으리라.
그럼 다음 질문. 위 문장에서 빠진 표현을 찾아서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겠는가? '무슨 소리지?' 하는 생각이 드셨다면, 다음 문장을 다시 읽어 보자.
양육자 1: (당신은) 밥(을) 먹었어?
양육자 2: (나는) 아까 (밥을 먹었어).
양육자 1: 그럼 (당신이 우리 아기의 기저귀를) 좀 갈아 줄래?(나는) 밥(을) 좀 먹게.
양육자 2: 아, 응 (내가 우리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줄게).
어떤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한국어가 모국어인 화자라면, 괄호 속에 든 구절쯤은 쉽게 채워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격, 목적격, 소유격
국어 시간에 배우는 한국어 문법 중 격조사가 있다. 주어 뒤에는 "은, 는, 이, 가"와 같은 주격 조사가 붙고, 목적어 뒤에는 "을, 를"과 같은 목적격 조사가 붙고, 소유격 뒤에는 "의"와 같은 소유격 조사가 붙는다는 것이다.
격조사가 왜 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자유로운 어순 때문이다. 주어와 목적어 등이 뒤죽박죽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도 단어에 격조사가 붙으니 각 단어의 위치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럼 걔네가 마구 옮겨 다녀도 배우긴 쉽겠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아니다.
한국어 구어체는 격조사를 쓰지 않아도 크게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는 다르다. 영어에서 주어나 목적어가 빠진 문장은 비문이다. 오죽했으면 "It"이라는 놈까지 만들어서 "It rains (비가 와~)" 했겠는가? 주어 자리를 비우면 비문이 되기 때문에, 명령문 같은 (예: Come here "이리 와라 이놈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주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 즉,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주어, 목적어, 동사와 같은 문법 요소를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으로 예측될 수밖에 없다. 늘 같은 자리를 차지하니까.
그럼 국어는. 상대적으로 주어, 목적어 등의 문법 요소에 노출될 일이 현저하게 적다.
한국 아기들은 이런 문법 표현을 배울 수 없는 걸까? 듣지도 못한 단어들을 문맥만 보고 때려 맞추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알아야 할 개념은 또 얼마나 많을까?
말 그대로, "빈 공간". 듣지도 못한 언어의 구조적 표현을 과연 배울 순 있을까?
놀랍게도, 배운다.
격조사를 제대로 쓰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만 (만 4세). 주어, 목적어라는 구조적 개념은 영어화자 아이들처럼 쉽게 배운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아이들은 대체 뭐에 노출된 것일까?
다시 노출로
언어학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아이들은 언어 구조를 만드는 핵심 요소를 가지고 태어난다.
2.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춰서 핵심 요소를 적응시킨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법 규칙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문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언어의 구조를 생성하는 핵심 요소를 말한다 (grammatical elements). 따라서 언어학자들의 물음은 어떤 것이 언어의 구조를 만드는 "핵심 요소"인지를 정의하는데 쏠려 있다.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핵심 구조 요소는 무엇인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길래 얼마간의 상호작용과 모국어의 노출로도 금방 언어의 구조를 완성하는 걸까.
이제부터 이 물음에 간접적인 답을 줄만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