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https://youtu.be/aOIwBpje50E?si=OI_ORnJpZkDCD8oP&t=1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하물며 전깃줄에 걸린 저 연(鳶) 마저도 먼지바람에 날리고 찢기면서도 집요하게 전깃줄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데,
저는 늘 남의 뒤꽁무니만을 쫓아다녔습니다.
배역, 인간. 저는 '인간'을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인간. 거창한 선언치고 사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분이 소위 발굴이라는 명분으로 저를 덥석 물어버린 순간, 저는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명배우가 되어야만 한 셈입니다. 그 분은 후원사와 함께 일열에 앉아서 관람할 터이니 기필코 대단한 공연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삽시간에 일대의 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막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필히 엄중한 처벌이 내게 떨어지고 말테야,라는 불안이 엄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디 연기라고는 생전 해본 적이 없고, 연극을 관람한 적도 없으니 저의 경력이란 마치 흰 도화지와도 같은 처지인 셈입니다. 인간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도무지 머릿속에 든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 같은 초짜가 아닌 진짜 배우들을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곧 맞지 않은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그들의 요령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의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는 행위 하나하나가 저에게 그토록 난해하고 어려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저를 집어삼켜버린 불안 말입니다.
혹여 대본 같은 것이라도 있는지 필사적으로 수소문했지만, 그들에게 대본 따위는 없었습니다. 모두들 즉흥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연극이 끝나고서도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연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 역할에 집어삼켜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만을 가지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파악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어디까지가 연기된 인간이고, 진짜 인간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그렇다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저는 어릿광대, 장난꾸러기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있고 심금을 울리는 연기는 피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존경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웃게만 만들면 된다. 웃음이면 충분해. 그러면 최소한 나에게 의심의 화살, 폭로가 겨냥되지는 않을 거야.라는 식인 겁니다. 저의 하찮은 밑천으로는 딱 맞는 것입니다.
어느덧 저는 훌륭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복은 실수를 교정해 주었고, 흉터는 경험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삶이라는 것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고 비참함을 감추고 있었지만, 저는 다소의 뻔뻔함을 가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비로소 인간의 자격을 얻었냐 하면은,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주위에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존재였습니다. 모조품은 결코 진품의 완벽한 복제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티가 나지 않는 것,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 그저 무(無)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지하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음지의 존재들을 위한 연극. 그것이야말로 저에게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본디 존재 자체가 범죄인 저는 어둠과 연대하면서 노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합법적 세계에서는 마땅한 인간의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류를 만났습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은 눈길만 스쳐도 서로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마음에 품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배우들을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행복을 누릴 자격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기야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원래 행복은 죄라고 인정해 버리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어느새 궁상맞고 추한 발악이 된 이상,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경 당시의 저는 스타라는 자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이겠지요.
동류와 함께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저는 무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저조차도 모르고 있던 질긴 생명력이 또다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 보여 준 것입니다. 저에게 자유란 가질 수 없는 환상이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연기할 수 없었습니다. 늘 남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것입니다. 저는 아비의 노릇을 하지만 진짜 아빠가 될 수 없었고, 인간의 노릇을 하지만 진짜 인간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세상은 원체 그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과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소위 '단칼 승부'인 것입니다.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노예로서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던 중, 저는 분수에 맞지 않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저 한 명의 관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닿는 순간만큼은 저도 그 배우들처럼 연기와 삶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익살꾼이었던 저는 코미디언이 되었고, 어쭙잖은 수습 배우는 배역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저를 마음속으로부터 믿어주는 이 어린 신부로 말미암아 차차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듯한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마침내 인간이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저는 병자입니다. 그것도 지독한 전염병입니다. 치료제 따위는 없습니다. 콱 죽어버리는 것 외에는 희망이 없는 겁니다.
그녀 또한 병에 걸려버렸습니다. 저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삼일천하. 딱 제 꼴이었습니다. 거지는 거지고 왕자는 왕자인 법입니다. 그 지독한 냄새, 그것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고고한 품위, 그것은 베끼려야 베낄 수 없는 것입니다.
병에 걸려 문드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야,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야,
놀랄 것 없어.
아아, 신뢰는 죄인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그것이 아니라면,
죄와 벌은, 과연 반의어인 것인가요?
부끄럼의 반의어는 몰염치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몰염치의 극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튼 바래면 안 되는 것을 바랐기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기에, 저주받은 운명을 이용해 먹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패배가 공인된 것입니다. 일약 스타는 광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연극인 줄 알면서도 다정한 웃음에 눈물 흘린 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던 것입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언제는 인간인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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