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튜디오 명 Jan 23. 2024

만년필

나의 물건 이야기 1




나는 대학교 졸업 선물로 받았던 ‘워터맨’ 브랜드의 '필레아' 만년필을 가지고 있다. 한동안 관리하는 게 귀찮아서 건드리지 않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걸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넣을 만년필용 잉크를 알아보다가 만년필 카트리지에도 ‘국제표준규격’이 있다고 하더라. 마침내 필레아를 포함해서 워터맨 만년필은 대부분 국제표준규격으로 나온 카트리지를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이왕 사용하는 김에 만년필과 같은 브랜드의 잉크보다는, 규격은 같지만 다른 브랜드의 잉크를 써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름 한 이틀 정도 열심히 알아보면서, 그 규격을 따라서 나온다는 ‘파버카스텔’이라는 브랜드의 만년필 잉크 카트리지를 사봤다. 택배를 통해 주문했던 잉크를 받았고 포장을 뜯어 내 필레아 만년필에 꽂았더니 우선 잘 맞게 들어가긴 했다. 그런데 거기에 만년필의 바디 역할을 하는 배럴을 연결하려는 순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년필 닙 가까운 쪽에는 국제표준규격이라 잘 맞았는데, 막상 필레아 바디를 제대로 돌려서 끼워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내가 이틀 동안 알아보고 산 건데 이게 안 맞는다고? 평상시에 물건 하나라도 제대로 사려고 엄청 노력하는데? 그때부터는 벌어진 것보다 훨씬 앞의 상황까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만년필 쓰는 게 뭐 큰일이라고 안 썼던걸 갑자기 써보자고 그걸 샀어야 했을까?


알고 봤더니 내가 샀던 잉크 카트리지는 ‘미니’ 규격이었던 점이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는 필레아 만년필은 ‘미니’가 아닌 ‘롱’ 규격이 맞는 만년필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필레아 만년필에 끼운 카트리지에 마스킹테이프를 둘둘 둘러서 불편하게 쥐어가며 다 써버렸다.



내가 화가 났던 건 여러 종류의 상품을 알아보느라 이틀의 시간을 날렸다는 거다. 그래서 이걸 당근이나 어딘가에 팔아서 돈으로 바꾸는 과정에 들어갈 시간부터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새 물건을 버려서 마치 낭비벽이 있는 것처럼 물건을 잘못 샀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쓰던 중간에는 잘못 산 카트리지를 온전히 쓸 수 있지만 불필요한 새 만년필과, 다시 정확하게 맞는 카트리지를 사려고 알아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소비는 내가 가지고 있는 뭔가를 어떻게든 잘 “써먹어보기 위해” 했던 거였다. 사실 만년필 외에도 색깔이 예뻐서 샀던 볼펜들, 대학생 시절부터 함께하는 나의 파트너 제브라 4색 샤프볼펜, 어디서 받았는지 모르는 기념품 볼펜까지 굉장히 많은 펜이 있다. 게다가 요즘 보관용 공간 이슈 반 환경 이슈 반으로 아이패드와 노션을 생활화하는 페이퍼리스를 추구하고 있어 예쁜 필기구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것 또한 나의 완벽주의 강박을 보여줄 수 있는 한 단면일 것이다. 정말 객관적으로 보면, 잉크 카트리지 하나 잘못 샀다고 이렇게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좋지는 않아 보인다. 결국 나는 잘못된 물건을 사면서 시간을 낭비한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산 이후에는 어떻게든 써먹어보려고 불편함이 생기는 것조차 싫었던 거다. 그리고 이 고민이 결국 나의 상태에 대한 불만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절약에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소비 하나에서 의미를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젠 잠깐 소비 실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 ‘이 정도면 뭐 어때?’하고 충분히 넘길 수 있도록 크게 연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상시에도 내 삶에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을 사려고 안달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여 잘못 사더라도 그에 대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부담 없이 넘길 수 있는 안정이 필요하다. 이제는 물건 하나에 큰 의미를 갖고 확대 해석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