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작성됨.
영화를 자주 접하는 사람이거나 영화라는 문화에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라면, “영화 좀 추천해줘”라는 질문 따위에 한 번쯤은 이 작품을 대답으로 들은 적 있을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명작’ 혹은 ‘감동’이라는 프레임에만 가둬두고 멀리했던 이 작품을 오늘에서야 보다니. 과제를 핑계 삼아 새벽 한 시, 나는 넷플릭스를 켰다. 반가운 로빈 윌림어스가 128분간 ‘캡틴’으로서 보여준 행위들에 한껏 설레 보기 위해.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라는 우리 ‘캡틴’의 말씀대로 온갖 전통과 규율에 갇혀 재단되던 아이들은, 기꺼이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세상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청춘을 아직 맛보기도 전에 멍청한 어른들의 침 튀기는 품속에서, 이 아이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첫눈에 반한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연극을 향한 열정을 감추지 못해 배역을 기어코 따냈으며, 자신들을 목 졸랐던 어른들에게 어리석지만 밉지 않은 반항마저 해내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됐건 아이들은 미소 지었고, 나 또한 내심 뿌듯한 감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존 키팅이 토드의 눈을 가리고 그의 가슴속 어딘가에 고여있던 말들을 끄집어낸 장면을 기억하는가. 토드는 ‘자신’에 갇혀 자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면상을 비추는 거울은 가리고 내면의 귀는 막아댔으며 끝없이 스스로를 멀리 밀어냈다. 시를 읊는 것조차 망설였던 그의 혼잣말을 캡틴만큼은 들었던 것일까. 친구들 앞에서 입도 뻥긋 못하던 토드는 눈을 감고 보이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담아뒀던 말들을 소리쳐 뱉어낸 것이다. 자신이 세워둔 울타리를 이제야 건너보려는 저 어린양을, 키팅은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볼 뿐이었다. 토드가 던져대는 진심을 그저 묵묵히 바라봐줄 뿐이었다.
나는 왜 영화를 보는 내내 낯설지 않음을 느꼈을까. 아마도 ‘입시 지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라서이지 않을까. 저들의 세상과 다를 것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의 주둥이로 마구 쑤셔 넣는 어른들의 안쓰러운 희극. 그리고 그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아름다운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한 닐 페리처럼, 지금도 어떤 아이는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다리를 잘라버린 어른들로부터 벗어나고자 눈물 흘릴 것이다. 영화에서 비춰준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만큼이나 자유롭게, 바닥을 향함으로써 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는 마지막까지 나를 사색에 잠겨 헤매게 했다.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며 책상 위로 과감히 올라간 아이들이 정의인가? 대담할 시간과 조심할 시간을 나름대로 해석한 앉아있는 아이들이 정의인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청춘들에게 완전함을 강요하고 집착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얼마나 떳떳한 하루를 그려나가고 있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수북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푸념이나 한숨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먼저 흘러나오는 시간을 사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가슴 뛰는 청춘이지 않을까? 나는 애써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