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자유는 어떤 것보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효율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만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에블린은 자유를 버렸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자유를 버리는 것을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우주에서 그녀는 누구의 딸인 동시에 아내이자 엄마이고, 세무 조사를 받는 이민자 세탁소 주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블린이 자유를 버린 우주에 그녀 자신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가항력으로 다른 우주의 자신을 ‘점프’하여 만나기 시작한 그녀에게 찾아오는 혼돈.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그녀이기에 수많은 ‘성공’을 빌려와 현재의 적을 타파할 수 있었다. 파괴되어 재탄생한 그녀의 마지막 적은 실체 없는 허무(虛無). 거대한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은 먼지 한 톨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녀는 다시금 선택해야만 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허무를 마주한다. 누구는 ‘그래서’ 좌절하고, 누구는 ‘그런데도’ 버텨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큼 무의미한 문장이 우주에 존재할까? 신은 죽었다. 에블린은 자유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했다. 시공간이 뒤틀려 모래바람 흩날리는 아찔한 곳에서, 돌멩이에 눈알 붙인 ‘존재 아닌 존재’가 되었음에도 에블린은 사랑을 지껄였다. 사랑하니까.
영화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더없이 무거운 주제들을 풀어헤친다.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의 영화를 영화라고 볼 수 없다 했지만, 다니엘과 다니엘은 마블이 가장 잘하는 멀티버스를 차용해 기시감을 적당히 섞어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만들었다. <와호장룡>의 양자경이 <화양연화>의 장만옥으로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정말 모든 것을, 모든 곳을, 한 번에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