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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an 02. 2024

25. 자녀를 향한 낙인은 곧 자기소개

당신과 나의 고통




고작 그 말 한마디에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말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자아가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 한마디는 그러므로 아이의 전 생애를 바꿔버릴 수도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닌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씨앗이 되는지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다.


열 살 무렵의 일이었다. 집에서 엄마와 이모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열 살의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가 엄마의 무릎에 앉았다. 엄마는 내게 바닥에 앉으라고 했고 나는 싫다고 했다. 엄마는 이모에게 " 얘는 애정결핍인가 봐."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얘는 애정결핍인가 봐>라는 말의 의미를 그 당시에 내가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추후에도 그 말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무의식에는 그 말이 남았고, 살아가며 맺는 모든 관계에서 나는 기본적인 결함을 가진 존재인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또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우울증을 겪으며 마음에 대해, 인간의 심리에 대해 공부하면서부터이다.


엄마가 그때 한 말은 굉장히 상징적인 말이며, 그녀의 나에 대한 관점과 양육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 한마디는 무가치감, 열등감, 수치심의 뿌리가 되어 삶의 방향을 결정했고 내 행동들을 결정했다. 누군가 내게 사랑을 고백해 왔을 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조리 거절했고 누군가 나의 좋은 점이나 강점에 대해 말해도 그것은 사회적인 언어일 뿐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나는 애정결핍을 가진 사람에 걸맞게 행동하면서 살았다.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문제적 존재는 누구인가


문제적 존재는 누구인가?


만약, 우리의 눈앞에 열 살짜리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가 애정결핍의 문제적 증상(?)을 보인다. (그 문제적 증상이란 엄마의 무릎에 앉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이에게 있는 것일까?

아이의 행동을 수정해야 하나?


아이가 애정결핍적인 증상을 보인다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낙인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양육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않은 부모는, 혹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문제는 아이에게만 있다고 여기며 자기를 돌아보고 변화를 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 역시 사랑할 수 없다. 열 살짜리 아이가 엄마의 무릎을 파고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는 엄마를 안고 만지면서 자라난다.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가는 큰 아이는 아직도 가끔 내 품을 파고든다. 열 살의 나를 가리켜 엄마가 했던 그 말은

실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야 든다.









양육의 목적


양육의 목적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엄마의 그림자를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그 그림자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 매 순간 죽고 싶었다. 엄마는 내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사랑받아본 적 없는 자신의 슬픔과 수치심을 내게 주면서 내가 이런 고통 속에 살고 있단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녀가 원한 것은 결국 [깊은 사랑]이었고 그것을 나(자녀)로부터 얻고자 했다.


나는 엄마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으며 자랐고 또 지금도 (연락을 끊었으므로) 미움을 받고 있다. 그녀가 나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그녀가 원하는 [깊은 사랑]을 주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자녀는 어떤 노력을 한대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크기로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굳이 크기를 가늠하자면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 만약 그 반대를 원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원하는 것이다. 양육의 목적은 주었던 사랑을 돌려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립이다.


부모는 빚쟁이가 아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부모에게 그 빚을 갚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효도는 선택이지 필수는 아니다. 만약 어떤 부모가 빚을 갚기를 요구한다면 어른으로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부모가 아이를 문제적 존재로 대한다면 그것은 자기소개일 확률이 농후하다. 아이를 향해서 내 소개를 하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성찰한 어느 비 오는 날에, 나는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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