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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Feb 16. 2024

36. 명절의 추억을 새로 만든다.

당신과 나의 고통




명절마다



일 년에 두 번, 재판을 받았다.


/ 죄인은 들어라.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인답게 행동하고 노예답게 행동해라. 그러지 않으면 너를 벌하겠다.


모두가 즐거운 명절이었다. 명절 특선 프로그램이 이삼일 간 이어졌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거나 노래를 불렀다.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방을 치웠다. 나도 그래야 했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평소 먹지 못하던 음식들이 차려졌고 다들 그 음식들을 먹으며 웃었지만 나는 삼킬 수가 없었다. 재판을 앞둔 사람이 즐거울 리가 있나.


/ 너 그동안 엄마 말을 잘 들었느냐? 너 때문에 엄마가 재혼도 못하고 저 고생을 하고 사는데 네가 잘해야지. 엄마 속 썩이면 가만 안 둔다.


그런 말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내면화하게 한다. 유년기 내내 일 년에 꼭 두 번 그런 말을 들어야 했다. 재판석에는 엄마의 남동생들과 오빠들, 검사석에는 이모와 외할머니와 엄마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재판은 그들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초중고등학교까지 12년간 그런 재판을 겪었다. 억울한 것은 구체적인 잘못을 들어 혼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처벌적이고 징벌적인 그들의 태도였다. 나를 바라보는 경멸적인 눈빛이 너무 아프고 억울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엄마 역시 그들 곁에 서 있다는 것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혼자서 명절



독서실에서 명절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재판이 싫어 명절만 되면 독서실에서 잠을 잤다. 세배만 하고 가방에 소설책과 만화책을 잔뜩 넣어 집을 나왔다. 추석 때는 좀 괜찮은데 설이 곤란했다. 독서실이라 해도 집처럼 따듯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는 돈으로 뭘 사 먹거나 하고 싶지 않아 독서실비만 지불했다.

명절에 문을 여는 독서실을 찾아다녔고 이틀간 밥을 굶었다. 춥고 배고프고 우울했다.


명절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게 그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요구를 했다. 이틀간 굶은 딸을 걱정하기보다 그런 내 행동이 너를 사랑받지 못하게 하는 거라는 비난을 견뎌야 했다. 나는 명절마다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 어떤 행동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런 존재여서 그런 말들과 눈빛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명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명절을 떠올리면 외롭고 우울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플 뿐.







즐거운 추억



엄마! 이번에 뭐 할 거예요? 같이 해요!!


큰 아이는 내가 해주는 식혜가 너무 먹고 싶다고 많이 해달라고 했다. 작은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왔다. 엄마! 이번에 음식 뭐해요? 나도 하고 싶어요!! 기대에 충만한 기쁜 눈빛, 무언가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하는 천진한 표정이 아이의 얼굴에 가득 담겨 있었다.


/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가 조금만 할 거야. 많이 안 하려고.

/ 왜요? 나 하고 싶은데... 재밌잖아요~

/ 정말 재밌어? 게임하거나 친구랑 노는 게 더 재밌지 않아?


아이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쿠키와 빵을 굽는다. 유튜브로 레시피를 따라 해 보고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가 요리를 하면 와서 뭘 하는 거냐, 이건 뭐냐 이건 왜 이렇게 하냐 묻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명절은 레시피 놀이와도 같다. 아픈 추억에 아이와의 즐거운 추억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어떤 추억은 인간을 서글프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추억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원동력 같은 추억을 많이 많이 만들어서 끝까지 기쁘게 살아남고야 말겠다. 보란 듯이, 잘 살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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