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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Sep 20. 2024

2. 신뢰

사라져버린 것들





신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가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곳은 15평짜리 작은 주공 아파트였다. 명절이 되면 성인 열 명 남짓이 모였다. 삼촌들은 몇 시간이고 고스톱을 쳤고, 안방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기침이 나왔지만, 밤늦도록 화투판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비좁은 방에서 사촌 동생 한두 명과 TV를 보다가, 때때로 술을 사러 슈퍼에 갔다. 맥주 서너 병, 소주 서너 병, 담배 한두 갑이 든 검은 봉지를 들고 가로등 아래 둔턱에 잠시 걸터앉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아득히 검고, 끝이 없었다.


그때 내가 우울했는지, 불행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담배 연기 때문에 목이 아팠고, 머리카락과 옷에는 기름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지독한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명절이 싫었다. 어느 날부터 그들이 올 시간이 되면 나는 독서실로 향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며, 도서 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책과 소설책을 가방에 가득 넣고 그들이 오기 전에 독서실 갔다. 독서실에서 자는 것이 훨씬 나았다. 담배 냄새도 없고, 좁지도 않았다. 내게 허용된 책상 하나만큼은 아무도 침범하지 못했다.


마음은 편했지만, 배는 편하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명절날 독서실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던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기도 어려워서 뭘 사먹을 돈은 없었다. 그래서 종일 굶었다. 집에 음식이 많이 있었지만, 나를 위해 음식을 챙겨줄 사람은 없었다.


독서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더 추웠다. 독서실 앞 공중전화로 가서 50원을 넣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추운데 작은 이불 하나만 가져다줄 수 있어? 여기 집 앞 독서실이야.”


수화기 너머로 삼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이불을 가져오래? 오살년.”


수화기를 내려놓자 전화기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실망이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부분 용서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결국 무언가를 잃게 된다. 그게 신뢰든, 사랑이든, 애정이든, 혹은 자기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든, 무엇이든 잃어버리게 된다.


명절마다 먹을 것을 사는 대신, 나는 책을 빌려 독서실로 갔다. 그때의 배고픔이 상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인 배고픔이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나는 어렸다. 열 다섯이었으니까.


그 시절 나는 사랑과 신뢰를 잃었지만,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내게 글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삶의 많은 상실과 고통 속에서 안전기지가 되어주었다. 눈에 보이는 어른들은 나에게 상처를 줬지만, 책 속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존엄성에 대해, 인간의 가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파괴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미숙하고 악의적인 어른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책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책은 내가 만나지 못한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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