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기쁨을 느낄 때는 언제일까?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목표를 성취했을 때? 인정받을 때? 돈이 많아졌을 때? 좋은 집에서 살 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우산 없이 외출했는데 비를 피할 수 있을 때? 알싸한 가을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이론을 정립하고 설파해 나갈 때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체계 안의 인간을 주장했다. 인간은 단순히 의식과 무의식의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융은 집단무의식을, 아들러는 가족관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포유류이며 혼자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무리 안에서의 양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생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먹고사는 일보다 관계가 더 힘들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인간에게 관계란 필요하며 고통을 주는 체계인지도 모른다.
관계가 인간에게 너무 만족감을 주면 인정욕구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소외된다. 또 관계가 너무 불만족감을 주면 무리로부터 배타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 소외가 일어난다. 관계란 인간을 포함하는 동시에 소외시킬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나기 때문에 이 거대한 관계라는 체계 안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관계체계적인 관점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긴 시간 관계 안에서 좌절을 많이 겪었다. 특히 나의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랬다. 어머니는 모든 친척에게 내 존재의 부적절함에 대해 이야기해 왔고, 언제나 그런 내가 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체계에 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언제나 나는 수정해야 할 결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식이 40여 년간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가벼운 나의 일상 이야기조차 하기가 어려웠고 그런 오랜 시간이 이어지다가 이제는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에 분노했고 싸웠고 울었고 깊이 슬펐다.
이런 깊은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그래도 그래서야 되나, 그래도 부모인데, 그래도 키워주었는데, 그래도 그래도라는 말들이 들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더니 기쁜 상태가 뭔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기쁜 건지, 어떤 상태가 기쁜 상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때 행복한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늘 결점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만 한 사람이었다.
기쁨의 상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이해.
나는 관계 안에서 기쁨을 잃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오랜 시간 성찰할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때 괴로운지, 어떤 때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경험하고 들여다보니 성찰하는 능력이 생겼다. 나에 대해 민감해졌고 나에 대해 민감해지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깊이 관찰하고 민감해지게 되었다.
민감한 성찰 능력은 시간과 해를 거듭할수록 발효가 되어 더 깊이 있는 성숙을 향해 가고 있다. 기쁨을 상실했다는 건, 슬픔과 아픔을 많이 느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쁨은 반드시 좋은 것이고 슬픔은 반드시 나쁜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상실했다는 것이 불행한 인생이며 커다란 비극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나는 슬픔과 관계를 맺었고 그로 인해 얻은 것들이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대한 진심이다. 그것이 나를 과거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