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입사 초에 실없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언젠가,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을 동경해 왔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 당시, 웹툰을 즐겨봤던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신입 사원 시절, 바쁜 삶을 핑계 대며,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한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웹툰 작가의 꿈은 그저 내 생각에 머물렀다. 출퇴근을 반복하는 직장인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다시 그리기로 마음먹은 뒤에, 웹툰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비전공자 직장인이 웹툰 작가가 되는 현실적인 첫걸음은 웹툰 준비 주말반 학원을 등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던 2019년 말쯤에 나는 어떤 목표를 생각하지 않고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했던 것 같다.
인체 스케치 연습
종이에 연필로 인체 드로잉을 하거나, 펜으로 4컷 만화를 그렸다. 오래전에 사두고 펼쳐보지 않았던 앤드류 루미스의 <인체 드로잉> 책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연한 스케치를 위해서는 HB 연필을 썼다. 진한 어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4B연필을 썼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이 검어지는 날도 있었다. 흑연을 박박 씻어내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표현할 수 없는 보람으로 가득 찬 행복을 느꼈다. 펜으로 그린 4컷 만화는 어디다가 올리기 부끄럽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며, 과거에 내가 그린 만화를 보며 나 자신을 다독일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디지털 드로잉 도구를 사용해야 내 그림 작업이 조금 더 확장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덥석 금전적인 투자를 하지 못했다. 내 첫 디지털 드로잉 도구는 핸드폰이었다. 갤럭시 노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펜업(PENUP)이라는 모바일 그림 SNS에 사람들이 멋진 그림들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다들 이렇게 핸드폰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데, 나도 도구 핑계 대지 말고 그림을 그려보자.”라고 생각했다. 인물 위주의 그림을 그려왔지만, 배경을 그리는 연습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기억이 있는 프림로즈 힐의 숲길을 그려보고 싶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프림로즈 힐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언덕을 올라가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런던 시내를 볼 수 있다. 영국에서 드문 맑고 화창한 날에 동생과 나는 프림로즈 힐을 방문했었다. 따스한 햇빛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동생과 함께 숲길을 걸었다. 숲길 양 옆에는 큰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고, 나뭇잎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나와 동생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며 프림로즈 힐을 걷고 있는 우리 둘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좁은 핸드폰 화면을 확대해 가면서 틈나는 대로 열심히 그렸지만 좀처럼 완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회사 친구가 구입한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보게 되었는데 그림이 훨씬 더 잘 그려졌다.이거다 싶었다. 내 드로잉 도구는 핸드폰에서 아이패드로 진화했다. 그리던 그림을 아이패드로 옮겨서 완성했다. 도구를 바꿨지만,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장장 6개월이 넘게 걸렸다. 퇴근 후 저녁시간과 주말에만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너무 오래 걸렸다. 원근법, 채색법, 다양한 작화 방식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나는 인터넷을 선생님 삼아 “풍경화 그리는 법, 아이패드로 나무 색칠하는 법, 머리카락 색칠하는 법” 등을 수도 없이 검색해서 보고 그림을 고치고 또 고쳤다. 내가 느꼈던 나뭇잎의 반짝거림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다. 그림은 점점 정교해졌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런 속도로 내가 웹툰 작가가 될 수 있을까?웹툰 작가는 역시 전업으로 전향하지 않으면 도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짧은 호흡으로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과 당장 웹툰 도전은 어렵겠다는 우려로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이모티콘 작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이모티콘은 메신저 등에서 “내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는 아이콘”이다. 나도 카카오톡에서 대화 중에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을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판매할 이모티콘 시안들로 구성된 제안서를 제출하고, 카카오 내부 심사를 통해 승인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만든 이모티콘을 카카오 이모티콘 스토어에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이전에는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었다. 평소에 귀엽고 밝은 그림을 좋아하고, 귀여운 동물, 아기 영상 보는 것을 좋아하고, 스티커를 구매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이모티콘을 그리는 일"은 마치 선물 같은 시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솔직히, “이모티콘 작가가 되면 돈을 많이 번다” 는 뉴스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내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이패드 프로크리에이트 앱을 통해 이모티콘을 그리고, 카카오 이모티콘 스튜디오에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모티콘 제작 관련 책들과 강의 영상들도 찾아보았다. 이모티콘 작가 카페에도 가입했다. 그래도 풍경화를 그리면서, 연필로 드로잉을 하면서, 펜으로 만화를 그리면서 그림 구력이 조금이라도 쌓이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1년 6개월 동안 20여 번의 미승인을 받았다."세상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쩌면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을 수도”라고 생각했다. 그림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가락 틈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출처: https://emoticonstudio.kakao.com/ 카카오 이모티콘 스튜디오에서 이모티콘 제안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승인"은 탈락이 아니고 아직 승인받지 못한 상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승인"을 받기를 원하긴 하지만, 이모티콘을 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모티콘을 그리는 시간에 "재테크", "경제신문 읽기", "영어"를 하는 것이 내 인생에 더 도움이 되고,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주고,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해야 할 자기 계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시간이 나면 계속 이모티콘을 그렸다. 그러다가 22번의 도전에서 기적처럼 카카오로부터 승인 메일을 받게 되었다.
직장인으로만 살아왔던 내가 카카오 이모티콘 작가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한걸음 더 내딛으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