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선악과 이야기, 그로 인한 원죄 개념은 어쩌면 인류 역사에 걸쳐 과학이라는 개념이 충분히 제안되지 않았던 시기에 우리의 존재와 형태, 양식, 필연성에 대한 설명을 뭉뚱그려 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했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마치, 천둥번개가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창세기의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창세기는 선사시대 신이 인간의 사상 개념에 있어서 신성함이라든지, 숭고함이라든지의 고차원적 사상 영역에 충분히 위치하지 못하였던 시기에 신이라는 것의 자각에 그쳤던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종종 제기되는 질문인, 우리가 왜 중동 유목민족의 신화를 알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1) 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어느 신화든지 그 형태가 문화적 배경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 결국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유목민족의 배경에 기초한 신화는 단지 한 사례일 뿐 일반화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 (2) 그러한 측면에서 창세기의 메시지는 보다 명확하다. 사고 수준이 발달하기 이전 신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존재로서, 그의 피조물인 자연이 주는 두려움과 완전히 구분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를 언급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항상 생각하여야 할 문제는, 우리가 비록 절대자라는 것의 존재를 천둥번개에서 느끼게 되었든 아니든, 그것과 신의 존재성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태초의 인류가 신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 자연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한 모든 가설은 거짓인가? 신의 존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은 사실 구약과 신약에서 묘사하는 신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구약의 신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는 과거의 신이 자연의 두려움의 모습에서 착각된 것에서 비롯된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이 수립되기 전의 막연한 상상속의 신이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 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각주) 신의 모습에 대한 이중성을 성경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모순성을 드러내보이기 위해서라고 아야기하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