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오던 날, 복도에서 바보처럼 쭈뼛거리던 경숙을 향해 얼굴이 눈부시게 하얀 혜원이라는 친구가 처음 말을 걸었는데 그 날 이후 단짝이 되어 수 많은 꿈을 함께 꾸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가 제법 알려진 곳의 고급 공무원이었던 그 애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딸 부잣집의 서글서글한 인상이 이름 만큼 예쁜 외모를 가진 귀한 셋째딸이었다.
같은 3번 타자이면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만큼
다른 환경을 가진 자신의 처지에 화도 났으나 서럽게 세상을 맞이한 천덕꾸러기 셋째 딸 신분을 늘 감추고 살았다. 그 애 집을 놀러갈때면 일하는 언니가 열무비빔국수에 얼음 동동 띄어 내 주던 알싸한
그 맛이 입에 착 착 감겼다.
더 먹고 싶지만 꾹 꾹 참으며 아껴먹던 어설픔이 그 속에 묻힐 만큼이니 기막힌 솜씨였다.
마지막 번호인 경숙은 앞 번호대의 꺽다리들과 어울리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아쉬운 마음에 원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토요일이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유네스코 회관으로 몰려들어 진추아 주연의 사랑의 스안나, 닥터지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영화에 미친 한동안은 멋진 서양배우의 커다랗고 푸른 눈이 뱅뱅 맴돌아 넋이 나가기도 했다.
우수에 젖은 듯한 공허한 눈 빚,
그것은 서러움의 빛이 되어 가슴 속 깊이 꽃혔다.
참고서 핑계를 대며 뜯어낸 돈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그 시절의 영화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정숙이 하던 짓 그대로 사복을 싸들고 다니며 여의도 광장에 자전거 무리를 이루는가 하면 동대문 스케이트장으로 몰리는 날엔 한마리 우아안 백조가 되기도 했다.
가방에 몰래 사복을 꿍쳐다니며 원없이 놀기도 했으나 정숙과는 차원이 다른 범생이의 정당하고 타당한 놀음이라는 자부심을,앞세웠다.
흰 염소에게 볶이던 어린시절에 집 앞의 논에서 어쩌다 스케이트를 탈 기회가 있었는데 첫 발 부터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마치 내 발에 익숙한 신발을 신고있는 느낌이 들었다.
신데렐라 유리구두가 그보다 더 편하게 잘 맞을까 싶을 만큼의 안정감을 주었다
한번 신어 본 것에 대한 끝없는 미련을 떨구지 못 한 채
먼 발지에서 넋 놓고 스케이트장을 바라보넌 경숙에게 고물장사의 다 낡은 스케이트를 안겨 준 것은 아비였다.
막걸리 한잔 값의 흥정으로 반 쯤은 억지가 섞였을 법한 주정으로 빼앗다시피 얻어 온 빨강색 스케이트는 색이 바래 희끗히끗한 것이 분홍에 가까웠으나 그런 것 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윗동네의 부잣집 아이들처럼 그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스케이트장으로 향할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에 절로 우쭐해졌다.
여고를 갈 무렵의 경숙은 토목과를 다니는 친구의 오빠에게 한달 비용 칠천원 하는 개인과외의 호강도 누렸다.
굳이 따로 배워야 할 명분도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사치를 부리고 싶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어미를 살살 꼬득여 과외하던 것도 모자라 학교 앞 양장점에서 멋대로 디자인 골라 오버를 다시 맞추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명숙인 다 낡은거 얻어다 입혀도 군소리없이 공부만 잘 하던데 정숙이란 년은 지 멋대로 썩뚝썩뚝 짤라 허리에 착 달라붙도록 지가 되는대로 듬성듬성 꼬매입고 다니더니 넌 어찌,제대로 된 걸 해 줘도 니 멋대로 또 맞추고 난리를 친다니...
베짱이 두둑한건지 간뎅이가 부은건지 원...
교복입는거 한가지만 봐도 성격이 다 보인다는 말을 덧붙히던 명숙네는 그래도 속 안썪이고 지 할일 다 하는 경숙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느날인가 중요한 손님이 오는 날이라
집에 와 보니 명숙이 사귀던 남자가 감사 나온 세무서 직원같은 안경너머의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퇴근길이면 논 밭 건너의 긴 개울을 지나 공장가로 들어서는 것을 질색하던 명숙이 벼르고 겁내던 일을 그
제야 헤치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공장지대를 빠져나가는 시간대에 그곳을 향해 들어 가는 자신이 초라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한번은 치루어야 할 숙제검사에 있어 남자는 세심한 관찰을 늦추지 않았다.
안경 속의 눈이 광채를 뿜어낼 정도로 빠르게 굴리며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해버린 손님은 저녁을 대충 먹고는 벙어리 삼룡이라도 되는지 입을 꽉 다물고 앉아있다 서둘러 돌아갔다.
그 날 이후 명숙을 까놓고 무시하더니 흐지부지한 만남을 깨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없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명숙이 보기 좋게 차인 환경의 패배였다.
멋 내는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활짝 핀 목련보나 더,화사한 정숙은 행여 누가 따라오기라도 할 세라 두어 정거장 쯤 에서 버스를 내려 한참을 걷는 미련을 떨었다.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거처가 공장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어쩌다 공장의 총각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치를 떨며 큰 눈을 휘번덕거렸다.
허올대만 멀쩡한 , 속 없는 아비의 입장에서야 원없이 배운 미모의 딸들이 공장 총각들에게 크나큰 자랑거리이겠지만 명숙네 자매들은 부디치는 눈길조차도 치욕이었다.
공장지대의 탈출을 수없이 꿈 꿨으나 아무에게든 얼른 시집이라도 가야 그 지금지긋한 곳을 탈출하는 방법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소심한 성격 그대로 자기 주장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던 영식이 온갖. 말썽을 부리며 구박덩어리로 전락하는가 싶더니 하루가 멀다하고 혼찌검 당하는 것이 안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귀한 3대독자라지만 명숙네의 입에서는 말끝마다 누가 버릇 들여놨는지 참 드럽게도 키워놨다며 뻔히 누군지 다 아는 그 누군가를 원망했다. 지 아비가 경비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담벼락을 넘다 걸리는일이 다반사였고 한밤중이면 주인님의 회전의자에 몸을 맡긴 채 코를 막고는 아무데나 수화기를 돌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아 요보세요 거기 혹시 공동묘지,아닌가요 ?
이런 제가 눈이 어두워 번호를 잘못 돌렸는데 그럽 중국집인가요.? 여긴 공동묘지인데 짜장면 열그릇만 가져다주세요
뭐가 그리도 신나고 좋은지 날마다 이어지는 장난전화에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혼자 키득거리는 모습이 마치 저능아 같았다.
보다 못한 경숙이 그만 좀 하라고 애를 잡는가 싶더니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전화번호부 책을 펴놓고 더한 장난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 인지 영식을 닥달하던 압력이 경숙에게는 일사천리로 통과였다.
오히려 더 못된 장난을 일삼는 경숙의 중계방송을 들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장난을 치면서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대차게 나온다 싶으면 금방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것 처럼 벌벌 떨던,영식과는 달리 더 악을 쓰며 욕을 퍼붓는 경숙에게 어미는 무섭고 못된 년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귀 뀐 넌이성 낸다고 되려 지가 껑거리 솟음이네 ,
그러다 진짜 잡혀가면 어쩌려구...
입으로는 질긴 년 독한 년 소리를 하면서도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완벽하게 장난의 끝을 마무리하는 것이 신기했떤지 더 이상의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못된 장난질도 무슨 칭찬 받을 일 이라고 역시 우리 셋째딸이라는 가장 듣기싫은 소리에 재수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김에 그만 두긴 했으나 쏟아져 나온 요금으로 인해 결국 쉬쉬하며 장난의 막을 내렸다
아직 어린 금숙이 별 말썽없이 싹싹하고살가운 존재였는데 어느 날 지 손바닥만한 병아리 두어마리를 사들고 와 안절부절하며 정성을 쏟았다.
2대독자로 외롭게 자란 아비는 명숙네에게서는 느낄수 없는 잔 정이 많았는데 사람이든 동물이든 심지어 풀 한포기 조차도 정성으로 보살폈다.고질병 주정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인심을 잃고 무시당하는 신세였으나 섬세하고 따뜻한 속을 아무도 헤아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귀하다는데 홀홀 단신 외롭게 자란 처지이다 보니 자식에 대한 애착심이야 오죽할싶었지만 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찮은 병아리새끼의 죽음으로 인해 어린 금숙에게 상처를 줄까 두러웠던지 온갖 장성을 다해 키워놨는레 기운이 넘치는 수닭들은 펄떡 펄떡 날아다니며 기를 쓰고 금숙을 쫓았다.
꼬꼬댁꼬꼬 소리를 목청껏 내질러 겁을 주기도 하고 주위를 맴돌며 쪼아대는 통에. 금숙이 기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