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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Aug 18. 2024

반장

학창 시절 이후 반장은 처음이라.

국민학교 시절엔 맨 까다롭고 차별 심한 선생들만 만나는 통에 학교 생활이 암울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 했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깨우침도 빠르고 척 척 알아듣는 흡수력으로 국어

산수 사회 자연 바른생활 총  다섯 과목에 늘 만점 수준이었다.

어쩌다 간혹  넘치는 자신만만함에  오만방자함을 곁들인 실수로 하나씩 긴가민가 할 때면 영락없이

 한 문제만 틀리곤 했다.

시험치르는 내내 자신의 점수를 가늠하며 거뜬히 해치웠으니 국민학교 수준의 시험은 시험도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 별명이. 흰 염소라는 늙다리 여시선생이 점수별로 우열분단을 나눈다며 수 분단 맨 처음 이름을 호명할 때였다.

ㅇㅇㅇ... 내 이름을 부르더니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아니, 아니 잘못 불렀어. 하며 다른 이름을 호명했다.

수십 년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웬수 같은 이름

 성 자 !

공부는 지지리 못 하는 돌대가리에 싹수도 노오랗던

 그 애는  치과의사 아버지의 후광을 짊어진 막강한 존재였다,  차별과 돈봉투가 난무하던 시대에 없는 집 딸인 나를 제치고 암튼 돌대가리가 수분단 일인자가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목 쭈~욱 빼며 이름 불리기만 기다리던  순진한 우등생은 결국 가분 단 맨 마지막에야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쭈뼛쭈뼛 자리에  앉을 수 았었다.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하얀 백지 속의 순수한 열 살,  3학년 짜리는 우수한 두뇌를  개무시 당한 채 가분 단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더 골 때리는 일은 쉬는 시간마다 수분단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가분 단 아이들을 상대로 일대일

단독 선생질을 일삼았다.

당당하게 내 자리를 빼앗은 돌대가리는 양심이란 걸

밥 말아 드셨는지 사수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잘난 척을 했다.

지가 묻고  버벅대며 얼버무릴 때면 어이가 없어 연필심만 꾹 꾹 눌러 뿌러트리는 것으로 심통을 부렸다

뻐드렁니를 고정시킨 그 애의. 보철 이빨을 보는 것 만으로도 역겨워 종소리 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맘먹은 대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우울한 유년기였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가난한 환경에 보기 좋게 참패한 서글픈 시절의 악몽 같은 시간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재능을 마음껏 뽐내며 영특함을 가감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전성시대가 포문을 열았다.

반장선거를 하던 날 , 당당히 투표로 회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고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의 상을 모조리 싹쓸이했다. 중학교 첫 국어시간에 30년 후의 자화상이라는  원고를 썼는데  발표를 하던 내게

 ㅇㅇ이는 이 담에 작가가 되어야겠구나  하시던  칭찬은  내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복도마다 걸리는 포스터는 내 이름 석자를 두각 시켰고  미술시간에는 곱고 어여쁜 미술선생의 최애 제자였다.

어느 날인가  과일 깎기 가사실습이 있던 날,

과일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사과 한 알,  참외 하나를

준비해 빨갛고 하얗고 노란색을 살려 솜씨를 뽐냈다. 검사가 끝나면 먹을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는데

내 접시를. 교무실로 홀랑  들고 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실습 만점 점수와  맞바꾼 과일접시였다.

누구한테 배우기나 한 건가, 뜨개질이며 바느질은

또 왜 그리 잘했던지  못한 게  대체 뭐냐고...

학기 초엔  일요일까지 등교해 환경미화에도 앞장서는

극성으로 반의 자존심을 지켰다.

미션스쿨이라 매년 학년 별 성가경연대회도  주  행사였는데  포디움 또한 아무도 넘 보지 못할  나만의 지정석이었다.

차별에 치이던  국민학교와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귀한 시간이었다.

나아진 환경 탓에 하고 싶은 건 원 없이 다 할 수 있었고

줘... 입만 열면  엄마 주머니가 자동으로 열렸다.

참고서나 자습서 한마디에  줄 줄 딸려오는 용돈과 더불어  극장 문턱이 닳도록 영화에 빠져들던 시기였다.

고전음악실인  종로의. 르네상스나  명동의 필하모니도 수시로  드나들었고 책 한 권에 꽂히면  날밤을 까더라도 정독,  다독. 총 동원 해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중학교 3년 동안은 안팎으로  내  인생 최대의  알차고

보람찬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딱 입학을 하니  갓 졸업 후, 첫 부임 해 오신

앳된  여선생님이  내 이름을 찾아 부르는 동시에

입학 적 일등이라며 반장을 구두로 임명했다.

중학교 내내 하던 가락이 있으니   반장 그까짓 거 어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정의에 앞장서고 음지도 살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현명한 반장 임무를 완수했다.

조용하지만 강단 있게. 감정을 내세우기보다는 반의 화합을 위해 늘. 고군분투하는 일상이었다.

대체적으로 순탄하고 평탄한 학창 시절을  지나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한 군데 직장만 7년여를  다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내 보물들이 태어나는 동시에  모든 게 두 놈 위주로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 2막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다른 것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집안일에 올인하며 아이들에게만 정성을 쏟아부었다.

나서는 걸 좋아하는  큰 아이가 임원이 되면서  온갖 학교일을 몰고 왔고 겨울이면  새벽바람을 가르며 교실 석탄을 지피는 일도  반장 엄마의 몫이었다;

커튼 달기에  청소는 물론, 스승의 날 일일교사며 소풍날 담임선생님 도시락 담당까지   엄마가 반장인 셈이었다. 공개수업이라도 있는 날이면 두 놈의 교실을 번갈아 뛰 다니느라 헥헥거리기 일쑤였다.

뒷문으로 내 모습이 나타날 때면  아이를 일으켜 세워

발표할 수 있는 배려도 해 주시는 담임 덕분에  밝게,

자신만만하게 성장하던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학교행사나 공개수업에 단, 한 번도 빠지는 일 없이 열과 성의를 다 하며 반장엄마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치루었다.


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동네 아주메들과 어울려

잠깐씩의  단순알바도 했었는데   처음 가는 장소에서도 익숙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며 같이 간 일행이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아무 데나 갖다 놓아도 오래 일 한 사람 같은 느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 그건 나도 인정하는 일이었다.  무식하게 눈치도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미련떨기 대신 간단하고 산뜻하게 요령을 터득하며 같은 작업이라도  단시간에  일을 마무리했다.

내 아이들이 최우선이었기에  한 군데 오래 정착해 다니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았다.

여자가 애들 놔두고 집 나가 백날 열 번 굴러봐야

지가 크게 한번 구르는 게 낫다는 남편이 애들 방치하는 것은 절대 못 본다는 고집 때문 에라도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야무진 재능을 가둘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냈다.


오랜 아파트 생활에 이어  빌라단지로 이사를 하니

한 동에 거주하는 열 가구가 돌아가며 반장을 한다고

했다. 관리비 내역대로 납부만 하던  차원이 아니다 보니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아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가장 오래 거주한 분이 오랜 시간. 반장을 했는데  무슨 변덕에서인지 갑자기 돌아가며 하자는 제의에 이어  반상회로 결정지었다.

바로 우리 집으로 바턴이 내려와 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입구에 써 붙인 개발새발 공고문부터 산뜻하게 갈아엎었다.  사방 덕지덕지 붙었던 테이프도 떼어내고  보기 좋게 정리를 해서  관리비 납부내역도 한눈에 보이도록  정리를 했다.

인계받은 장부도 꼼꼼히 확인을 하고 매달 지출내역과 통장잔고 확인도 필수 코스였다.

매주 치르는 청소업체나  년 중 행사들도 재 확인 하며

한눈에 들어오도록  쫙~정리에 들어갔다.

느닷없이 붙은  공지에 따라  일요일 오전 앞마당에서

치루었던 반상회도  단톡방을 만들어  어지간한 건

톡으로 해결을 했다. 아래층으로 몰린 각 세대의 에어컨 호스도 한 묶음으로 정리해 통에 물을 받은 다음 화단에 양보해 주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못 보던 오토바이가 자전거 거치대에  무단 주차하길래  번호를 찍어 올려 옆동 것 임을 확인하고 단칼에  차단시켰다.

누군가가 임의로  내 공간을 침해하는 건 묵과 할 수 없는  중차대 사안이었다.

주차 껀 민원도 사진을 찍어 올려 서로 조금씩만

양보와 배려를 발휘해 달라는 톡을 남겼다.

화단 옆 한 귀퉁이  내   길냥이 급식소도 재정비하며 깔끔하게 자리를 보존했고 치킨 찌꺼기나 음식물 쓰레기, 족발 뼈 등 을 주지 말라는 메모도 부착시켰다.

비교적 단톡에 입장하는 세대는 고정적이었으나

잘한 일은 우쭈쭈  칭찬하고 짚고 넘어갈 일은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며  무리 없이 반장임무를 수행했다.

학교 다닐 적 이후, 반장은  처음이지만  하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눈에 뜨이는 대로 부지런 떨며 완벽하게

ing.  상태라는 건 두말하면 잔 소 리!

반장경력이 토털 몇 년 인디  

나 왕년에 반장 했던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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