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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Jul 19. 2024

특기개발

날 따라 올 자 누규?

30대 중반 쯤 인가..

거의가  어디로든  출근하던 시절, 우리 집 멍멍이랑 나만 날백수로 지냈다.

앞 뒤 옆집 둘러봐도 눈 뜨면  놀러 가는지 돈 벌러 가는지 암튼 사람 코빼기도 안 보이던 때였다.

애들  챙겨 내보내면  이불 털기부더 시작해 날마다 반복적인  대청소가 이어졌다.

지금이야 이불 터는 제품도 여러 종류지만 그때는 오직 베란다 난간에 서서 탈탈 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힘이 쏠려 밑으로 떨어져 죽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는데  아슬아슬하게 극성떨던 시기였다.

여름철에야 가벼우니 홀가분하지만 겨울에는 두꺼운 이불을 시작으로  패드며 베개까지 아예 홍두깨를 하나 장만해 죽어라 두들겨 팼다.

스트레스 푸는 용도도 아니고 날마다 패고 두들겼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앞동 살던  같은 반 엄마가 상동에 가 볼 곳이 있다며  꼬드겼다.

10~4시까지 일 하면 밥도 주고 돈도 준다고..

애들이  저학년이라 한눈파는 건 꿈도 못 꾸고 오로지 살림에 애들, 남편 시다바리가 내 인생에 전부였던 때였다. 쓸고 닦고 때 빼고 광 내는 일과의 연속이었다.

눈 뜨면 청소를 시작으로 대충 혼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쫓기듯 허겁지겁 먹고는  장 보러 향했다.

빨리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누가  쫒아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늘 혼자 쫒기는 신세였다.

가족에 올인하며 내 인생을 내 스스로 들들 볶던 시절이었다.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는 것도

봐 넘기질 못 했다. 집이 반짝 반짝 광이 나니  애 학교

엄마들이 놀러 오면 다 들 한 마디씩 얹었다.

맨날 쓸고 닦고 그만 좀 해...

대충  살어  대충..때 빼고 광 내 봤자여. 몸만 고되지.

다음날이면 또 같은 일 반복일 텐데 뭐 하러  쌩고생이냐. 지들이 한탄을 했다.

우쭈쭈 절 한다 잘한다 ,북돋아 주지는 못 할 망정 그러는 사람들 집을 가면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

 난리 집구석이  없었다.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너저분한 게 지 상판대기만

 때 빼고 광 내  윤기가 좔좔 흘렀다.

날밤을 까고라도 집을 치워야지 난 그리는 못 살으...

그게  사람 사는 집구석이냐, 돼지 우리지~~~


그때 당시 시간에 비해 일당이 꽤나 높은 편이었던 터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뭐 하는 건데?  물으니. 응 ㅇㅇ엄마 특기 살릴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앗, 살다 살다 으찌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 이 나이에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니...

결혼 전  한눈 팔 줄도 모르는  바보처럼 한 군데 직장만

 거의 십여 년을  인내와 끈기로 성실히 근무했던, 닉네임하야  조 성실이 아니었던가.

란한 경력을 묻어두고  솥뚜껑만 운전하던  내게

특기를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다니 거칠게 없었다.

상동 대단지에 신도시가 들어서는데 수원에서 열 댓명 이 한 팀으로 와 준공청소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친척 뻘 아는 언니가 이 동네  근거리 거주자를 알아 봐 달라고 했다니  따라가서 손해 날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청소라면 내 또 일가견이 있질 않은가,

가기도 전에 자신감 뿜뿜이었다.

한창 인신매매가 활발하던 때였으나   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  일단 안심이었다.

남편한테 귀띰하니 애들 잘 건사하는 게 돈 버는 일 이지 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내가 열 번 구르느니 자기가 한번 구르는 게 훨 낫다는 둥 일장연설을 했다. 어디 끌려 가 감금되어 설거지하는 일도 아니고 일단

가 보겠노라  한껏 부풀어 올랐다.

다음 날,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서두르며 내집 청소를 마친 후 ,아래층 엄마까지 합세해 셋이 집을 나섰다. 우린 또 지각 같은 거랑은  절대 안 친하지.

9시 반에 도착해  막바지 단장 중인 정문에  5분 대기조로 기다리는데  시커먼  봉고차 한대가 스르 멈춰 섰다.

헉 저건 뭐냐,  우리 봉고차에 실려 새우잡이로 잡혀 가는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불길한 마음이 사사삭 스치는데 껄렁껄렁 한 40대 남자가  봉고차와  깔맞춤인지 시커먼 썬글라스를 뒤집어쓴 채 성큼성큼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입술에 온 힘을 모아 껌까지 짝 짝 씹으면서

젊은 언니들 반갑소잉...하는데 억양이며 사투리에서 부감은 느낄 수 없었다.

우리더러  젊은 언니래. 앞동엄마가 키득거리며

흉내를 냈다.  젊은 언니들 겁나  반갑소잉....

뒤 이어 50대 60대로 뒤섞인 아줌, 할매들이 시끌벅적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자가 입주지원 센터를 들러

네 명씩 세 팀으로 나눈 뒤 각 동의 맨 꼭대기 층 으로 올려 보냈다. 63세 빼짝 마른 할매가  우리 세명 팀에 끼어왔는데 신경질적인 외모와는 달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수원에서 같은 아파트 거주하는데 건너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라고... 운전자가  팀장이고 옆 자리가 여동생이라고 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비슷한 게 부부인 줄 알았다고 하니

풍기는 건 날 티 나도  시원시원  점잖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들어서자 마자 일단 내부 사진을 한번 찍은 후,

넷이서 일사분란하게 보양지를 걷어내고 각종 스티커나 전단지를 떼어내고  바닥을  대충 한번 쓸고

마대걸레로 대충  한번  쓱 닦고  다시 사진을 찍으면

한 군데  청소가 마무리되는 과정이었다;

소형 평수이다  보니  30분이나 걸릴까 말까 속전속결이었다.

근데 사진은 왜 찍는 거냐 물으니 비뽀, 애프터!

요랬던 걸 우리가 깨끗이 해 놨어요...라는 증거란다. 도 수월하고  네 명 한 팀이 수다 반 농담 반 곁들이며 대여섯 층을 내려갔다.

 신데렐라  유리구두인가 12시 땡  울리기 무섭게 점심 먹으러 가자는 기별이 왔다

근처 갈비탕집으로 가 노가다 했다고 배가 어찌나 고픈지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집에서는 대충 혼자 먹고  쌔빠지게 일 해도 노동인 줄 몰랐는데  실전에 뛰다 보니 밥맛이 꿀맛이었다.

점심 먹느라 한 시간가량 소비하고 열댓명이 어느

,한 집 정해  두 다리 쭉 펴고  커피 마시느라 거의 한 시간을 보냈다.

누구 하나 까탈 부리는 거 없이 둥글둥글  수더분한

사람들이었다. 오후 세 시간가량 같은 일을 반복하고 나니 5시가  채  되기도 전에 퇴근하세요..하며

일당 오만 원에  추운데 고생했다고  싸우나비 명목으로 만원씩을 더  주었다.

집 나와 몇 시간 일 하니 밥도 주고 돈도주고 목욕비까지 알바도 이런 꿀 알바가 없었다.

그렇게 서너 달을 힘든 줄 모르고 알차게 다녔는데 준공이 끝나 다른 현장으로 간다고 그곳까지 오라는 걸 집이 멀어  캔슬했다.

체험 삶의 현장을 몇 달  다니고 나서  터득한 건

그래, 이 기회에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해 보자  하는 굳은 결심이 앞섰다.

준공이 끝나면 입주가 시작되는데  바로 그 입주청소를 타깃으로 삼았다.

영업용 청소기를 구입하고 용품을 사들이고 전단지를 주문해 우리가 일 했던 단지에  뿌리기 시작했다.

준공청소를 하며  동거동락한 3인1조로  황금멤버를

 이루었다.  신기한 게 전단지를 뿌리고 명함을 돌리니

진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 상황 Rearry???


일이 많아짐에  따라 학교엄마, 축구엄마. 동네 사돈에 팔촌 아는 엄마들을  총 동원해  청소사업에 투입했다.

정말 내 주 특기를 가감 없이 발휘하던 황금기였다.

평당 만원 하던 시기였으니 30평대를 세 명이 한 팀으로

 하다 보면  사실 남는 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점심도

사 주고 간식도 대령하는 인심 후한  사장님이었다.

날 더울 땐 치킨에 생맥주까지 시켜 먹고 일을 했는데

높은 곳 닦느라 사다리에 오르다 보면 얼굴은 벌그적적 휘청거리는  오후가 따로 없었다.

까딱하다간 뉴스에 나오고도  남을  상황을 연출했다.

속보; 입주청소 하던 아주머니들  대낮에 맥주에 치킨

시켜 먹고 일하다  추락사...;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지역신문에  구인광고를 내기도 했는데  별별 인간이 다 있구나를  체험하던 시기였다.

베란다에 처박혀  바닥만 닦는 타입에서부터 방문 걸어 잠그고 청소기는 틀어 놓은 채로 핸드폰에 열중인  인간

욕실 거울만 벅벅 문지르며 시간 때우는 아주메,

일 하다 힘들면 거실장에 벌러덩 누워  까놓고 쉬어야 한다는 인간 등등..;

인간이 싫다  싫어  , 인간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절체절명의  내 인생 한 페이지였다.

애들이 커 가는 동안 짭잘한 부수입원 덕분에  대부분 하고 싶은 건 원 없이 거의 할 수 있어 흐뭇했다.

그렇다고 내 집 일을 소홀할 수 없으니  더 늦게 자고

더 일찍 일어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몸이 고달프니 마음도 피폐해지는 단계까지 이르러

여차하면  쫑 내리라  혼자 벼르게 되었다.

입주하는 곳을 검색해 전단지를 돌리고  연락이 오면 한걸음에 날아 가 내 집 일  하듯 정성으로 일처리를 했다.  어디서든 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이다 보니

소개소개로 일이 끊이질 않았다.

경기도 외곽의 먼 곳까지 행차해   밤늦게 오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는데 결정적으로 때려 칠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새벽 별 보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 오던 날 , 남편은 출장이었고  초딩 두 놈이 비빔면을  삶아 먹었다는 전화를 받고는 일각이 여삼추였다.

 대형 평수에 그날따라 인력을 통해 부른  두 년이

시간 때우기로  작당을 했는지  농땡이가 반이었다.

축구멤버 엄마랑 셋이 죽어라 일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엄마 비빔면을 삶아 놓았다는  메모가 보였다. 퉁퉁 불어 터진 비빔면을 보며 눈물 콧물 섞어 혼자 후루룩 거리는데  우씨,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란

생각이 뇌를 강타했다.

누구를 위하여 이 짓을 하는 건가..;

내 보물단지들을 방치한 결과에 밖으로 나돈 후회가

밀물이 되어  엄습해 왔다.

그래, 요 놈들 반듯하게  잘 키우는 게 돈 버는 것,

남편 말이 딱 맞았다.

맘먹은 건  단칼에 해치우는 결단력이 있으니  단기간의 청소사업 때려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쓸고 닦고 때 빼고 반짝반짝 광 내는 청소 일이라면

정말 자신 있고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으나  세상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내 두 보물을 위해  과감히 엎어버렸다.

하지만 자신할 수 있는 건. 청소에 관해서라면

나 따라 올 자 아무도 없다는  사실 !

왕년에 청소박사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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