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Fantasy V
이전글: 단순한 오락이 아닌 울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로 (brunch.co.kr)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레벨이 오르거나 스킬이 추가되는 식으로 점점 캐릭터가 강력해지는 성장형 게임에는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1. 특정 시점부터는 캐릭터가 너무 강해져서 이후의 플레이는 전투보다는 일방적 폭력에 가까워지는 경우
2. 캐릭터가 강해지지만 적들도 계속해서 강해져서, 점점 더 전략적인 전투를 요구하는 경우
후자의 계속되는 긴장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1번의 경우를 좋아한다. 특히나 성장형 게임의 초반부는 끔찍할 정도로 재미없고 약한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보상 심리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힘든 초반 구간을 견뎌내고 왔으면 뒤에는 좀 나의 강함을 만끽하게 해 줘도 되는 거 아닌가?"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 얘기해 볼 파이널 판타지 5는 그런 면에서는 최고의 게임이었다.
파이널 판타지 5는 파이널 판타지 4에서 진화했다기보다는 3에서 진화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확실히 4보다는 3을 닮았다. 막상 후속작인 파이널 판타지 6은 또 5에서 진화한 느낌이 아니라 4에서 진화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마 개발 기간상 4의 개발이 완료되기 이전에 5가 개발되기 시작하고, 5의 개발이 완료되기 이전에 6가 개발되기 시작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4도 3보다는 2를 닮은 느낌이다.)
4보다는 3을 닮았다는 얘기는, 서사적인 면에서는 다시 몰입감이 떨어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시 3 때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털의 힘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을 물리치자'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물론 4와 비슷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악당인 [엑스데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서 주인공 무리에게 간섭하고 사사건건 시비 걸고 다니는 모습은 이전 작의 추잡한 악당 [골베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심지어 골베자 때보다 더 치사하고 추잡해서 그런 부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수많은 캐릭터들이 각각의 역할(잡)을 가지고 파티에 합류/이탈을 반복하며 스토리텔링에 박차를 가하던 이전작에 비해서 파이널 판타지 5는, 주인공 파티가 크리스탈의 힘으로 모든 걸 때려 부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식으로 진행되다보니 캐릭터들의 개성도 약해지고 전반적인 스토리의 몰입감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파이널 판타지 3을 돌이켜보면, 3가 스토리가 재미없었다고 재미없는 게임이었나?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파이널 판타지 3의 매력은 잡 시스템이 주는 육성과 성장의 재미, 이를 기반으로 한 전략적 전투의 즐거움이었다. 파이널 판타지 5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때의 잡 시스템이 더 고도화되고 다양한 특수효과의 아이템들까지 추가되면서 성장 고점이 훨씬 높아졌고, 전략적 요소도 더욱 다양해졌다. 심지어 고점이 너무너무 높아져서 마지막에는 최종 보스고 뭐고 다 때려 짓뭉게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
우선 파이널 판타지 3의 잡 시스템을 짤막하게 이야기해 보자. 각 캐릭터는 22개의 직업군을 비전투시 언제든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었다. 각각의 잡은 고유한 특수능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이를 적재적소에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나이트 = 대신 맞기, 바이킹 = 도발, 용기사 = 한 턴 무적, 한 턴 1.7배 공격 등의 특수능력이 있었다.
파이널 판타지 5도 22개의 직업군이 있다. (버전에 따라서 몇 개 더 추가된 경우도 있다.) 직업군의 개수는 동일하나, 3 때는 사실 흑마도사→마인, 백마도사→도사 등 단순히 2차 전직 느낌으로 존재하던 직업들이 있었던 반면 5는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직업 22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전보다 약 5개 정도 직업이 늘어난 느낌이다. 번외 직업인 1개의 직업을 제외하면 직업이 모두 열리는 시점도 게임의 초중반이어서 각 직업에 대해 충분한 플레이를 즐겨볼 수 있다. 그리고 직업 숙련도에 따라 직업마다의 특수 능력이 점점 추가되는 식으로 변경되어서 직업 하나하나를 육성하는 재미가 이전에 비해 더욱 쏠쏠해졌다. 직업 숙련도를 올려야 하는 동기가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과거에는 단순히 화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직업 숙련도를 올렸었는데, 5에서는 이 직업의 다음 특수 능력은 무엇일지 같은 호기심과 기대감을 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직업을 이것저것 해보게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전략적 요소가 다양해졌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결국 모든 직업을 다 마스터해 버리면 직업 5개 남짓 늘어난 것 외에는 파이널 판타지 3 때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래서 위에 더해서 파이널 판타지 5의 잡 시스템에 추가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기본 직업 [무직]이 다른 직업의 스탯과 특수 능력들을 일부 복사해 간다는 것“
이다. 물론 파이널 판타지 3 때도 기본직업인 "양파 기사"가 타 직업의 최대 스탯을 복사하는 식이었어서 최대 레벨인 99를 달성하면 기본 직업이 스탯 상으로 제일 강하긴 했다. 그러나 무직의 강함은 단순한 스탯으로 그치지 않는다. 특정 직업의 숙련도가 최대치가 되면 해당 직업의 패시브형 특수 능력들이 모두 기본 직업 "무직"에 반영되고 여기에 더해서 타 직업의 액티브형 특수 능력을 두 개까지 선택할 수 있어서 후반의 무직은 각종 강력한 특수 능력들로 점철된 괴물이 된다. 예를 들어,
닌자의 패시브 능력 [이도류](무기를 두 개 착용 가능+2회 공격) +
사냥꾼의 액티브 능력 [난사](무작위 대상에게 4회 공격) +
마법도사의 액티브 능력 [마법검 Lv.7](공격 시 마법 사용)
와 같이 조합하면 강력한 무속성 마법인 플레어를 한턴에 8번씩 난사하면서 한 캐릭터가 한 턴에 79992 데미지를 줄 수 있다. (참고로 파이널 판타지 5의 최종 보스의 체력이 22만이다...) 따라서 특정 시점부터는 보스가 아닌 일반 몬스터들은 마법검 없이 난사 + 이도류 만으로도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데, 이때부터 굉장히 게임이 시원시원 해진다. 어떤 몬스터든 그냥 버튼 한번 누르면 다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대해서 "어떤 넘버링 타이틀을 추천하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답변한다.
"더 잘 만든 게임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게 한 건 파이널 판타지 5다."
게임으로부터 성취감, 감동 등의 가치를 느끼는 경우도 많지만, 결국 오락적인 면에서 재미있으려고 하는 것이 게임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육성과 조합의 재미, 그리고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강함의 즐거움까지, 파이널 판타지 5는 굉장히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