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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안 Feb 26. 2024

희망은 가장 절망적일 때 비로소 가장 밝게 빛난다.

Final Fantasy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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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판타지 6의 오프닝

 세 체의 로봇이 설원 위를 걸어간다. 이 로봇들은 "마도 아머"라는 제국의 전쟁 병기이다. 마법의 힘과 과학의 힘이 합쳐진 이 병기들은, 과학은 퇴보하고 마법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사라져 버린 이 세계관 속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한다. 제국과 황제는 이 병기들과 개조인간들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게임을 시작하고 3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등장하는 위 오프닝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표현된 픽셀이미지, 몰아치는 눈보라와 뭔가 을씨년스러운 음악, 그리고 위에 보이는 크레딧이 하나로 어우러져 게임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오프닝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오늘 얘기해 볼 게임은 바로 이 오프닝의 주인공 [파이널 판타지 6]이다.


파이널 판타지 6의 커버 이미지

 사실 파이널 판타지 6에 대해 소개할 차례를 앞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굉장히 재미있게 한 게임인 것은 맞는데, 막상 글로 적으려고 하니 어떤 내용부터 어떻게 적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글쓰기를 계속 미뤘다. 한참 고민하다 보니 감이 안 오는 이유가 "사실 내가 그냥 이 게임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보니 너무 억지로 잘 써주려고 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쭉 쓰고 넘기기로 했다. 굳이 억지로 추켜세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고 잘 만든 게임이니 말이다.


 파이널 판타지 6 이전의 파이널 판타지들은 흔히 "판타지"하면 떠올릴만한 세계관 속에서 진행이 됐다. 세계의 역사나 구성은 다를지언정, 중세느낌의 성과 마을, 신비한 힘의 크리스탈과 마법, 용과 정령을 비롯한 환상의 생물들과 같은 요소 하나하나는 판타지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던전 앤 드래곤과 같은 서양 판타지를 많이 보고 참고하여 만든 시리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파이널 판타지 6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파이널 판타지 6은 "마법이 융성하던 시절을 지나 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마법이 사라진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성과 마을은 중세보다는 산업혁명 이후의 디자인에 가깝고, 마법의 기반이 되던 환상의 생물(이하 환수)들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의 곁을 떠나버렸다. 더 이상 세상에 마법은 존재하지 않고, 마법보다는 과학이 국력의 원천이 되어 제국의 병사들도 기사가 아닌 군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과학 연구소(좌) 와 제국 수도로 향할 때 보이는 스카이라인(우) / 판타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괴리가 있다.


 사실 중세 기반 판타지 세계관이 주는 매너리즘은, 단순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RPG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이널 판타지 6은 과감하면서도 기존의 틀을 아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시도를 통해 이 숙제를 멋지게 풀어냈다. 누군가는 "1~5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판타지 기반 세계관이 가질 수 있는 미래 중 하나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 오히려 아예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막상 정말 완전히 우주와 같은 다른 배경을 함부로 시도했다면 그대로 망해버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이 파이널 판타지 6에는 공식적으로 명시된 주인공이 없다. 정확히는 각각의 캐릭터들이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에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모두 주인공이라는 것이 제작사의 입장이다. 물론 실제로는 캐릭터마다 스토리 깊이나 완성도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를 주인공 취급하는 게 조금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제작사가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스토리상 덜 중요하거나 낙오되는 캐릭터가 없고 누구든지 세상을 구할 수 있다"가 아닐까 싶다.

플레이 가능한 주인공들

 이전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들고 났던 파이널 판타지 4를 돌이켜보면 주인공인 "세실 하비"만 고정이고 파티원들은 스토리에 맞춰 계속 변경되었었다. 그렇다 보니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던 플레이어는 그 캐릭터가 파티에서 이탈해 버리면 아쉬울 수 있었다. 실제로 필자도 열심히 키우던 몽크 "양"이 자폭을 하면서 파티에서 방출되고 그 자리에 노망 난 할아버지가 들어왔을 때 굉장한 박탈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파이널 판타지 6은 여러 명의 캐릭터 중 특정 플레이 구간을 어떤 조합으로 돌파할지 캐릭터들을 골라서 파티를 꾸리고 이들로 진행하는 식이다. 플레이 가능 캐릭터가 추가되었다고 기존 멤버 자리에 굴러온 돌이 박히는 게 아니라, 박힌 돌들을 뺄 생각이 없으면 굴러온 돌만 주머니에 쏙 넣어두고 계속 박힌 돌들로 플레이할 수 있는 식이라고 보면 되겠다. 상황에 따라 캐릭터들의 특수한 상호작용이나 이야기가 숨어있는 경우도 있고, 캐릭터들의 특성에 따라서 구간의 난이도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파티를 요리조리 바꿔보는 맛도 있다.


 혹자들은 해당 파티 시스템으로 인해 오히려 스토리의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저 파티 시스템 덕분에 스토리를 더 몰입도 있게 즐길 수 있었기에 저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면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처음에 게임을 시작할 때는 '티나 브랜포드'라는 소녀로 게임을 시작한다. 마법이 사라진 세계임에도 이상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 소녀는,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모든 마법사 직업군이 그랬듯이 초반 성능이 심히 좋지 않다...

 꾸역꾸역 버텨가며 플레이하다가 이 소녀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파티원은 트레저 헌터 '로크 콜'이다. 말이 좋아 트레져 헌터지 특수능력이 [훔치기]인 것을 보면 그냥 도둑 클래스이다. 이 캐릭터도 역시 시리즈 대대로 도적 직업군이 그랬듯이 훔치기라는 능력의 대가로 전투 성능은 그리 좋지 않다... 초장부터 가장 약한 캐릭터 둘로 제국군을 피해 도망치다 보면 제국에 대한 원망과 소녀의 안타까운 상황이 뼈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만나는 세 번째 파티원은 제국군에 대항하는 혁명단체 리터너의 멤버이자 한 나라의 왕 '애드거 피가로'인데, 애드거가 파티에 들어오는 시점부터 파티의 화력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로크와 티나가 만들어낼 수 있는 데미지의 두 배 이상을 광역으로 뿌려버리기에, 살기 위해 제국에게서 도망치던 두 사람에게는 희망이자 구원이나 다름이 없다.

 심지어 네 번째로 만나는 애드거의 동생 '매슈 피가로'의 합류시점부터는 전투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이 시점부터는 처음의 그 비루했던 시절은 새까맣고 잊고 "게임이 너무 쉬운 거 아니야?" 같은 오만한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 뒤로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이벤트로 인한 피가로 형제의 거취에 따라 게임의 난이도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데, 형제 두 명이 모두 파티에서 이탈하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수준의 지옥은 마주할 일이 없고 오만함은 점점 하늘을 찌르게 된다.


열차를 들어서 메다 꽂는 미친 캐릭터 '매슈'


 그러다가 게임이 1부에서 2부로 넘어가게 되면, 티나보다도 더 약한 '셀리스 셰르' 단신으로 2부를 시작하게 된다. 셀리스를 중심으로 4명의 파티원을 찾는 것이 2부의 시작 스토리인데, 셀리스는 1부에서 파티에 강제되는 시간도 굉장히 짧고, 강제되지 않는 구간에서도 피가로 형제를 비롯한 타 인원들에게 항상 우선순위를 뺏기기에 이전에 딱히 육성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2부 시작 시점에 성장이 전혀 안 되어있었고, 2부 시작 몬스터인 쥐와 영혼을 걸고 싸워야 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다..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도 노양지과하게 행동하던 오만한 나는 없어지고 그저 생쥐와의 전투에서도 도망가기를 할지 말지 고민해야 하는 참혹한 모습만 남아있었다.

 '이거 정상적으로 게임 진행이 가능하긴 한 건가?'를 걱정하면서 꾸역꾸역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에 있던 것은 다름이 아닌 매슈 피가로였다. 마치 내가 진짜 셀리스가 된 것 마냥, 매슈의 등장은 너무나도 반가운 이벤트였다. "드디어.. 드디어.. 사람 구실 하는 파티원이 생겼어..!" 그 이후 시점부터 게임의 난이도는 다시 평범하게 돌아간다. 매슈라는 희망이 셀리스 한 명으로 버텨오던 끝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다.


 앞의 두 예시와 같은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설계된 게임 디자인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얻어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단순한 플레이어로서가 아닌 마치 게임 속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이때의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지독하게 약했던 티나, 세리스, 로크가 내가 마지막에 게임을 클리어할 때의 파티 구성원이었다. 처음에는 가장 약한 이들이었지만 게임이 완료되던 시점에는 온갖 사기 아이템들을 몸에 칭칭 감고 말도 안 되는 마법을 턴마다 4번씩 갈겨대는, 가장 강한 이들이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로크 콜은 게임사 측에서 의도한 사항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쓸모없는 캐릭터에서 강한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강한 캐릭터가 됐다. 이는 로크의 전용 장비의 영향도 있으니 어쩌면 의도된 사항일지도 모르겠다. 1부를 진행할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티나, 세리스, 로크가 세상을 구하는 모습"... 피가로 형제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게임의 대주제인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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