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할머니와 막내고모와 부모님이 같이 살았던 때가 있었다. 대략 6-8세 정도였던 것 같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바쁘셨고 할머니에게 나의 양육을 맡긴 상태였다. 대학생이었던 막내 고모는 할머니와 함께 지방에서 같이 올라와 대학 근처에 방을 구하는 대신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았다. 고모는 굉장히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고모를 생각하면 부스스한 파마머리와 스웨터가 딱 떠오른다. 폭닥한 스웨터를 의인화한 것 같은 잔잔하고 포근한 미소를 가진 그녀. 그리고 또 떠오르는 하나. 고모는 항상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는 것. 고모의 방 한 면 전체가 모두 책이었는데 흡사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 나오시는 교수님들의 연구실 뒷배경과 흡사했다. 그러니 어린 나에겐 박물관만큼이나 신기했고 알아볼 수 없는 책들이 즐비한 그 방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 이유가 있는데 첫째, 당시 6세 정도였던 나는 까막눈이었다. 한글을 깨치기 전에 수백 권의 책들을 만난 것은 외국인과의 조우와 같았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이해하진 못하지만 굉장히 알고 싶은 미지의 존재. 둘째, 고모가 읽는 책은 한글로 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영어 원서가 굉장히 많았는데 당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전공책들과 유학 관련 시험공부 때문이었다. 그런 이상한 나라로 가는 통로인 듯한 방의 소유자. 하지만 웃음이 따뜻하고 항상 밝았던 순둥이 우리 막내 고모는 어릴 적 나의 좋은 친구이기도 했지만 평생의 유산을 남겨준 내 인생의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전반적인 삶을 정해 준 사람.
외동이었고 막 이사를 와 근처 친구들이 거의 없던 나는 고모가 공부할 때 수시로 고모 방을 들락날락거리며 고모의 공부를 방해했을 것이다. 뭘 하는지, 뭘 읽는지, 왜 나랑 지금 놀아주지 않는지. 골치가 아픈 수다쟁이 꼬맹이였을 텐데 고모는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엄하게 한 적이 없었다. 대신 하루는 한글책을 사가지고 와서 나를 불렀다. 상을 펴 놓고 나를 앉힌 다음 고모는 차분히 한글 자음, 모음들의 이름과 음가를 알려주었다.
"이건 기역이고 '그' 소리가 나. 'ㅏ'는 '아' 소리가 나고 이 두 개를 합치면 '가'가 되는 거야. 이건 니은이고 '느' 그럼 'ㅏ'랑 합쳐지면 어떤 소리가 날까?"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지만 금방 패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자음과 '아'의 합친 소리들을 마스터했다. 살면서 조각조각 생각나는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데 한글을 배웠던 당시의 나는 처음 느끼는 학습의 희열을 경험했었던 것 같다. 그 한글책 맨 앞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던 빽빽하게 표로 정리된 자음, 모음들을 가로, 세로로 손가락으로 연결해 합치며 광기에 가득 차 한글을 알려준 그날 저녁 모든 한글을 읽어냈다. 이렇게 쓰니 마치 문과 천재의 탄생처럼 보이지만 그럴 리가. 그저 떠듬떠듬거리며 그 한 페이지에 나온 소리들을 연결해서 한 번씩 읽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고모의 간결한 설명이 일등공신이었고, 세종대왕님의 과학적 논리에 입각한 한글의 체계가 까막눈도 하루 만에 소리를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이 정설. 이렇게 7살 인생에 신세계가 열렸다. 드디어 고모가 가지고 있던 책들뿐만 아니라 눈으로 볼뿐 알지 못했던 글자라는 것을 해독하는 '한글'이라는 암호체계를 내가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대문자를 풀이해 내는 언어학자만큼이나 나는 들떠있었다.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라고만 알고 있던 까막눈은 개안을 할 준비가 되었다. 7년 인생 최대 챌린지. 코드명 '까막눈 탈출' 미션 성공. 그리고 나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똥꼬발랄했던 까막눈이 글자를 읽게 되었다? 그건 바로 우리 집 어른들이 수시로 고통을 당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 음가표를 이해한 날 이후로 고모가 사준 한글 배우기 책을 여러 차례 독파하였고 점점 빨리 읽게 되고 실수가 줄어들면서 자신감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가서 세상의 모든 글자들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고모 책장에 있는 책들의 제목들을 팔만대장경을 읊듯이 어린이의 본분에 맞게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매일 몇 시간씩 읽어내버리고 있었다. 티브이나 신문에 나오는 글자들..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이 한글이라면 닥치는 대로 활자중독처럼 읽어대며 심심했던 나의 하루를 그렇게 놀이 대신 한글에 심취해 살았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에겐 분명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시간을 때우기 좋았고 잘 읽으면 어른들의 칭찬이 따라왔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인정욕구가 강한 금쪽이였던가..
이렇게 한글 폭주족으로 살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모는 내게 첫 책 선물을 주었다. '단군이야기'와 '나이팅게일'. 한글을 이제 막 시작하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에게 아기자기한 동화가 아닌.. 우리나라의 뿌리를 알도록 하고 남을 위해 열심히 산 열혈 간호사님의 이야기라니. 지금의 나라면 나의 조카가 한글을 막 시작했을 때 저런 책을 사주었을까 자문해 본다. 음.. 아닐 것 같다. 고모는 아마도 나에 대한 기대치가 꽤 높았거나 아이의 눈높이가 아닌 자기가 아는 책 중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 책을 고르신 듯도 하다. 순혈 책벌레 종족인 고모의 선택. 아직 그 책들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 선택이 나에게는 통했던 것 같다. 사람은 종종 이런 뜻하지 않은 경험으로 의도치 않은 능력이나 기술을 체득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게 나에게는 '독서'였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고모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자신의 어린 조카에게 영원하고 참 좋은 벗을 만들어 주셨다. 이사를 많이 다녀 친구를 사귀면 또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던 나의 유년 시절. 그때 내게 책을 읽는 힘이 없었다면 아마도 매우 부정적이고 불안정하게 성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초중고 시절 내내 독후감과 글쓰기와 독서로 상장들을 제법 모았으니 조카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보람은 느끼실 수 있으셨으리라.
고모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즈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무료로 매일 연락을 하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우리는 그저 우편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거나 종종 국제전화를 걸어 서로의 안부를 짧게 물으며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쯤 고모와 할머니는 한국에 잠시 들어와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다시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난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한창 사춘기에 들어서던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부모님은 내게 여름 방학에 잠시 미국에 네가 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아빠의 바로 윗 누나인 둘째 고모는 내가 태어날 때즈음 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 일을 했고 후에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할머님과 막내 고모를 미국으로 불러 고모의 유학을 서포트하고 할머님의 심장병을 케어하셨다. 그게 내가 8살 되던 해의 타임라인이다. 그리고 약 7여 년이 지나 막내 고모는 석사, 박사학위를 땄고 곧 국내 대기업에서 구체적인 연봉까지 오퍼를 받고 들어오려고 논의 중이었던 때였다. 그녀의 황금기가 펼쳐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내 추측으로는 고모가 완전히 들어오기 전에 나와 함께 미국 여행이라도 다니다 오려고 하는 건가 싶었다. 그 당시 첫 해외여행도 굉장한 일이었지만 내가 언제나 그리워 마지않던 할머니와 고모들을 보러 간다니. 사촌들도 본다니.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간다니! 여러 가지 상상과 계획들이 머리에서 각자 춤추고 있었다.
"막내 고모한테 사고가 났어."
아빠가 무거운 톤으로 짧게 말했다. 뭐라고? 무슨 말이지.. 이게.. 듣고도 듣고 싶지 않던 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뺑소니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는데 뇌사 상태래."
이런 말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고모가 왜. 우리 고모가 왜.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부터 가슴까지 반으로 갈리는 느낌. 몸이 서서히 쪼개지는 느낌이 든다. 내 소중한 세상 속 스웨터 천사에게 그런 일이 왜? 왜.. 왜.. 좋은 사람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길까. 세상에 그런 논리란 없다는 걸 알기에는 나는 너무 순진했고 무지했다.
어떻게 비자를 받고 어떻게 비행기를 타서 미국 고모와 고모부, 할머니를 재회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도착한 그다음 날 막내 고모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둘째 고모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미리 알려주었다.
"널 알아보지 못할 거야."
거짓말. 다 거짓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고 있지만... 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병적으로 기를 쓰고 현실을 인지하지 않으려 했다. 병실을 열기 전만 해도 나는 기대했다. 고모가 나는 알아볼 거야. 내가 온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기적이란 게 있어. 내가 들어가면 고모의 신경들이 자극이 돼서 활성화될지도 몰라. 그렇게 서서히 회복되는 거지. 가능해!! 없는 일이 아니잖아? 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고모는 다른 사람처럼 누워있었다. 눈빛도 표정도 내가 알던 고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섭거나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낯설었다. 고모의 손을 잡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고모.. 나 왔어. 제발 눈이라도 깜박여 줘.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밖에 없던 부탁이었다. 고작 중1이었던 나에겐 기적이 필요했고 또 그런 걸 믿어야만 그 상황 속에 있을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고모와 지낸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보고 만져도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는 듯했다.
고모는 3년간의 투병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작은 상자 속에 담겨 할머니와 고모는 함께 영원히 귀국을 했다. 그리고 나란히 가족 묘지에 잠들어 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가족 묘지를 가기 전 카페에 꼭 근처 카페에 들러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달달한 밀크커피와 고모가 물처럼 마셨던 블랙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묘지 앞에 놓아주고 마치 같이 수다를 떨 듯 옛날이야기와 서로의 근황을 공유하며 한참을 머물다 온다. 나름 우리 가족의 전통이랄까.
고모는 알고 있었을까? 내 인생에서 고모의 가르침이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아직도 내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지? 고모의 유산은 나의 영혼에 깊이 스며들어 평생을 함께 하고 있다. 내 인생의 첫 스승. 매일매일 그립다.